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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은란 Jan 30. 2018

밤 늦은 이야기

"선생님은 모르시죠. 그런 밤이 있다는 걸요. 참을 수 없이 불안하고 추운 그런 날이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덜덜 떨고 있었다. 마치 지금도 그런 밤에 와 있는 것처럼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떠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어 타인의 이야기를 오래 들을 수 없게 된 노인은 불운한 그 입을 기어코 또 열고야 말았다.
"다 철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겠지."
짧고도 굵은 그 음파는 유약한 소년의 가슴을 여러 번 찔러 넣고는 모든 힘을 다 빼놓았다.
"아주 이상(理想) 같은 이야기를 하시네요. 아무튼 그런 밤에는 모두 소용없는 말이에요. 나는 그때 너무 추워서 점점 더 이불속으로 파고들고 있었어요. 늘 잠들 땐 옆으로 돌아 누워 자는 게 내 버릇이었지만, 그 날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내 등 뒤로 무언가가 다가와서 갑자기 날 꽉 껴안아 버릴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소년은 고백하듯 중얼거렸다. 소년은 자신 앞에 앉아있는 노인이 더 이상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확신했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작은 컵에 차를 따르다 이제 거의 넘칠 때가 되었지만 웬일인지 자신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이다. 노인은 그런 소년을 이제 거의 체념한 듯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내일 아침, 식탁에 내어놓을 생선의 맛을 떠올리면서.
"똑바로 누워서 천정을 보는데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왔어요. 사람들의 목소리였는데 너무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와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아무튼 내 방 안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그 소리들이 너무 싫어서 내 귀를 막아버렸지만, 그건 귀 속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이 아니었어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고는 목이 탔는지 탁자 위의 커피를 한 모금 할짝였고, 노인은 이제 막 자신의 냉장고 속에 놓인 생선 대가리의 방향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선생님은 제 이야기를 안 듣는 것 같아요"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던 어느 부분에서 갑자기 속상함이 밀려왔는지 투정 부리듯 말했다.
"네가 듣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 목소리들처럼 말이지..."
노인은 이제 더 이상은 들어줄 수 없다는 듯 손사래 치며 말했다.
소년은 잠깐 동안 안색이 굳어졌다 풀어지더니,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얼굴과 말투로 툭하고 내뱉었다.
"선생님은 참 멍청해요."
"난 이렇게 지루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털어놓는 너의 머릿속이 참.. 궁금하지 않는구나.."
노인은 이제 정말 지쳤다는 듯 마구 쏘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냉장고 속 생선에 대해서 떠올리려 하다가 뭔가 다른 것이 떠올랐는지 운을 띄웠다.
"생각해보면 참 오래되었어. 몇십 년 동안의 일이었는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군.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야."
"선생님의 그 입은 나이를 아주 많이 먹어서, 닫힌 채로 완전히 굳어버렸나 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나 보네요."
소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웬일로 길게 말을 하려는 노인이 신기한 듯 귀 기울였다.
"그래. 자고로 어린 네가 나 같은 노인의 말을 끊는 것은 예의가 아니란 걸 이야기해주고 싶지만 그냥 그만두기로 하마. 아무튼, 오래된 이야기지. 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내 나이보다 더 오래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어. 아주 옛날 나도 너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 말이야. 들으려 하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계속해서 뭔가를 털어놓는 것 말이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곧 그게 아무 소용없는 일이란 걸 깨달았던 것은 내가 왜 그렇게까지 계속 이야기하려 했는지 이해했을 때였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거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를 찾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거지. 침묵은 금이라지만, 나는 금만 가지고는 행복할 수 없는 철부지였으니까...."
노인은 먼 과거를 떠올리면서 오래간만에 추억에 젖는 듯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하.. 지루한 이야기네요 정말"
소년은 노인의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노인의 느린 이야기 전개 속도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노인은 그런 소년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곧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튼 어느 날 밤이었지. 달도 없고, 별도 보이지 않는 아주 깜깜한 밤이었어. 그 녀석이 나를 처음 찾아왔던 건 말이야. 한밤중이었어. 소리든 빛이든 조금도 없는 밤. 녀석은 별안간 인사말도 없이 턱 하고 어딘가에 걸터앉더니 중얼중얼 대기 시작했어. 나는 그 녀석의 목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곧 귀를 막아버렸는데, 이상하게도 녀석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들려왔어. 게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
소년은 노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차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노인은 그런 소년이 이제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는 듯 무덤덤한 표정과 말투로 계속 이야기해갔다.
"그렇게 첫 밤이 지나고 두 번째 밤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역시 달도 별도 없는 깜깜한 한밤중에 다시 녀석이 나를 찾아왔지. 이번에도 쉴 새 없이 중얼대는 녀석의 말소리는 짜증을 불러일으켰어. 게다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밤은 녀석의 목소리가 더 날카롭고 더 가까이 다가오게 만들었어. 끔찍했지. 그렇게 그 후로도 녀석은 몇 일간격으로 계속 나를 찾아왔고 난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했어. 하지만 나는 오래가지 않아서 녀석의 패턴에 점점 익숙해졌고 녀석을 짜증 나게 하는 것에서 권태 같은 것으로, 또 습관으로, 시간이 더 지난 후에는 무의미한 것으로,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지."
노인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잠시 말을 멈추었고 탁자 위에 커피 한잔을 홀짝였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빈 방안의 허공에다 다시 입을 떼었다.
"이제 알겠지? 이게 내가 너와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이유란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이 되었고, 소년은 자신의 정체를 들켰는지 어쨌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쩌면 아주 도망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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