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100 글]77일, 일흔일곱 번째 썰
어제 오랜만에 회사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술 한 잔 걸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시간이 지나고 다들 얼큰하게 술이 올라왔을 때쯤,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오전에 내가 외근을 나간 사이, 사무실에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전해 들은 이야기는 꽤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었다.
현재 우리 회사는 4개의 층을 사용하고 있다. 한 층당 기본 평수가 좁아서 각 부서들이 거의 끼어있는 느낌으로 배치되어 있다. 같은 층수는 상관없지만 부서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소통이 힘겹다는 단점이 있다. 인터폰이 있긴 하지만 부재중일 경우도 많고, 휴무도 제때 확인이 되지 않다 보니 나름의 고충이 있다. 그래서 올해 끝 무렵 건물 계약이 종료되는 시점에 맞춰 회사 이전이 결정되었다. 좀 더 넓은 평수로 가겠다는 대표님의 확고한 의지 덕분이었다.
좀 더 쾌적한 환경을 위해 인테리어도 새로 해서 들어가기로 했다. 인테리어 업체 측으로부터 가도면을 받아 효율적인 업무 환경을 위해 각 부서의 헤드들이 모여 회의를 했는데, 거기서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우선 회사의 모든 인테리어를 담당하고 있는 VMD 팀이 회의를 주관하여 간략한 브리핑을 했다. 이후 도면을 확인한 물류팀에서 공간이 너무 협소해 사용할 수 없으니 더 넓혀 달라고 요청한 것.
여기까지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 물류팀에서는 공간이 너무 좁은 나머지 외부에 있는 임대 창고를 사용하고 있다. 만약 회사 건물에 필요한 제품이 부족하면 외부 창고까지 움직여서 가져와야 하는, 몹시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고 있다. 그런데 이사 가는 건물에 배정된 물류팀의 크기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사용 공간을 넓혀달라는 물류팀의 요청은 어찌 보면 타당하게 느껴졌다. VMD 팀의 부장님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VMD 팀의 부장님. 그는 현재 15년째 이 회사를 다니고 있으며, 임원진들이 가장 신뢰하지만 그만큼 꺼려하고, 불편해하는 직원이다. 평소의 그는 조금 깐깐하지만 상호 간의 매너를 몹시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실제로 부장님과 대화를 나눌 때 쓸데없는 사생활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남이 불편해할 만한 농담도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나이 차가 꽤 나는 남자분이지만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상사들이 신뢰하지만 꺼려하고 불편해하는 직원일까. 업무를 할 때 사람이 180도 달라진다. 사람이 완전히 바뀐다. 그 분야에서 경력과 경험이 많으신 만큼 그에 대한 프라이드가 상당히 강하시다. 우선 뭔가 업무를 전달하면 일단 안 된다고 하신다. 밀린 업무가 많다며 스케줄을 뒤로 미루신다. 그럴 때마다 삼고초려의 기분이 이런 건가 싶다. 왜 굳이 일을 만드느냐, 이런 뉘앙스의 말도 많이 하시는 편이다. 그래도 다들 어쩔 수 없지, 하신다. 툴툴 대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업무의 완성도는 높은 편이기에 업무 전달하기 부담스러워도 다들 감수하는 편이다.
또한 업무 한정으로 본인 말에 토 다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신다. 어느 정도냐 하면 언젠가 백화점 부티크 오픈으로 매장에 나가신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동행하신 이사님에게 소리를 지르셨다고 했다. 사유는 이사님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누가 봐도 상사인 사람에게 부하직원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 말이 되느냔 말이다(더 큰 문제는 이런 하극상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는 어떤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것 때문에 거래처에서도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하다고 들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이런 성격을 지니신 부장님에게 물류팀의 과장님이 태클 아닌 태클을 건 것이다. 안 그래도 회사 이전을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하신 분이셨다. 왜? 지금 사무실에서도 일 잘만 돌아가는데 왜 굳이 이사를 가서 사람을 귀찮게 하냐는 것이었다. 뭐, 이건 이해가 가는 부분이긴 하다. 어쨌든 이사 때문에 VMD 팀이 바빠진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다음부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회의실에 들어가지 않아서 모두 전해 들었고, 모두가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만 적어보겠다.
과장님의 발언 이후, 그때부터 부장님의 막말이 이어졌다고 한다. 야, 너는 기본이고 삿대질까지 하셨다고 했다. 내가 너네 부장한테 몇 번을 설명했는데 못 들었냐며, 내 말을 왜 이해하지 못하냐며 소리를 질렀다고 하셨다. 물류팀에서 뭔가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애초에 들을 생각조차 없으셨는지 말을 다 자르고 소리만 질렀다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이 꽤 긴 시간 이어졌다고. 다른 분들이 말리려고 해 봤지만 전혀 듣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지르셨다고 했다. 그리고 분에 못 이겨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시며 날리신 마지막 결정타.
“미친 것들이 말귀도 못 알아 처먹네.”
현재 이 일로 모든 물류팀 직원들이 퇴사를 할 것 같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더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 문제의 부장님과 입사동기인 물류팀 부장님께서 가만히 보고만 있으셨던 것. 안 그래도 봉변을 당하신 과장님께서는 이렇게 돌아가는 상황 때문에 더 분노하셨다고 한다. 어떻게 된 회사가 부장 한 명이 날뛰는 걸 막지를 못하냐며, 다들 수군거렸다.
나는 과연 문제의 부장님께서 생각하시는 매너라는 게 무엇일까 궁금하다. 상식적인 선에서의 매너란 상호 간의 존중을 바탕으로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하지만 이 날 부장님께서 보여줬던 행동에서는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무시한 형태이지 않느냔 말이다. 말이 매너지, 모든 직원들에게 배려와 존중을 받고 싶기만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이 날의 부장님은 그저 매너의 껍데기만 두른 광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째 회사에 닮고 싶은 롤모델이 아니라, 저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싶은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