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맞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 - 독일에서 일하기
독일에서 첫 이직을 하고 6개월 수습 기간이 끝났다. 인사부서와 면담을 앞두고 하루 휴가를 냈다.
내가 잘 나서라기보다는 부서에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 중간 평가도 나쁘지 않기에, 면담에서 무난하게 얘기하면 정직원으로서 현지 노동법의 보장을 받으며 회사를 다닐 수 있다. 심지어 연봉협상도 6개월 만에 다시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 한켠에 망설임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가 하는 일은 디지털 에이젼시에서 이커머스 컨설팅, 온라인샵 관리 역할이다. IT 개발직은 아니고 고객사의 온라인샵 매출을 올리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컨설턴트이다. 독일에서 나름 큰 디지털 에이젼시로 회사도 꽤 괜찮다. 임직원 후생복지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보수도 나쁘지 않았지만, 수습기간을 마무리하는 인사 면담을 앞두고 하루 휴가를 낸 건, 이 일을 과연 계속해야 하나 하는 배부른 고민 때문이었다. 수습 3개월 중간 면담 때도 그랬지만 인사 면담이 꽤나 디테일해서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상당히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다. 이 번에도 면담을 앞두고 질문지를 미리 받았는데,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으며,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하는지, 어떤 점은 좋은지, 상사와의 관계는 어떤지 등 어찌 보면 일반적인 내용이지만, 굳이 좋게 포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하루 조용히 시간을 갖고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한국 나이로 살짝 늦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첫 취업을 하고 마흔이 된 지금까지, 두 번의 이직을 했고 세 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다. 첫 직장인 삼성전자에서는 대학 졸업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업무의 기본을 배웠다. 해외 영업 부서에서 마케팅과 세일즈, 물류, SCM, 회계 등 제조업 비즈니스의 생리를 배웠고, 글로벌 마케팅 부서에서 디지털 그리고 B2B 마케팅을 접했다. 많이 배웠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인 줄 알았고, 때로는 억지로, 때로는 자발적으로 주어진 일을 했다. 8년 조금 넘은 시간이 경력의 밑거름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인정받는 부분이 그때 배운 문서 정리와 프로젝트 관리, 그리고 비즈니스의 이해도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스스로 기획하고 실행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사원, 대리, 그리고 초년 과장이었으니까라고 하면 핑계일까. 큰 조직 안에서 하나의 작은 부속으로서의 한계는 어쨌든 있었으니까.
그만 두면 큰 일이라도 날 것 같던 첫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로 와서 시작한 두 번째 일은 작은 유통 회사의 E-Commerce 일이었다. 그곳에서는 3년 남짓 일 하면서 기획과 실행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눈을 뜨게 되었다. 작은 회사였기에 자율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일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스스로 목표와 전략을 세우고 회사의 전체 프로세스를 보고 막힌 부분을 풀고 내 부서 인력을 관리하며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한 단계 성장했다. 첫 직장에서 주어지던 업무와 프로세스가, 당시에는 불합리하거나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왜 그래야 했는지 이해하는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작은 회사의 한계라면 의사결정자가 주로 사장 한 명이라는 것이다. 사장의 의사결정 방향이 나와 맞지 않을 때 작은 회사 안에서는 다른 길을 찾기 어렵다.
나름 전문가들이 모인 세 번째 직장은 독일에서 꽤 큰 축에 드는 디지털 에이젼시이다. 몇 번의 실패 뒤에 얻은 기회라 뽑아준 회사에 고맙기도 하고 의욕에 가득 찼었다. (유통회사에서 디지털 에이젼시로 이직하기) 10여 년 넘게 고객 입장에서 일하면서 에이젼시에서는 어떤 전문가들이, 어떤 툴을 가지고, 어떤 분석을 하며, 어떻게 일하는지도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서 보니 에이젼시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지 모두가 정말 깊이 있는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혼자 구르며 주먹구구식으로 배운 나 조차도 시니어 컨설턴트라는 직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마 E-Commerce 분야가 비교적 오래되고 깊이 있는 분야가 아직은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어쨌든 이 곳에서는 내 수준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디지털 컨설턴트라는 포지션으로 링크드인이나 현지 잡포스팅 채널에 이력을 업데이트하고 나니, 이제 좀 이력이 구체적이 되었는지, 잡포스팅 정보 메일이나 헤드헌터 컨택이 자주 오는 편이다. 구직 중에도 물론 그랬고 요즘도 해외취업 관련 포스트나 유튜브 채널도 종종 보는데, 대부분이 취업 자체, 경력을 포장하고, 나를 셀링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보니, 취업이 최종 목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취업 이후에 회사의 업이 나와 맞는지, 해당 업무가 나와 맞는지, 어떻게 적응할 수 있는지 대한 내용을 참고할 수 있는 곳은 잘 없는 듯하다.
이 회사와 잘 맞는지는 들어와 부딪혀 보지 않고는 알기가 어렵다. 당장은 모르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게 약이 되었던 시간이었음을 알 수도 있고,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고 길고 크게 볼 줄 아는 시야가 생겨야 하기에 성급한 결정보다는 차근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지금 이 세 번째 회사에서는 내가 가야 할 길이 조금 더 명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개선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지, 내게 맞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디지털 에이젼시는 일을 내 관점에서 기획하고 실행하는 게 아니라, 고객의 비용과 고객의 필요에 맞추어 일을 대신할 뿐이고, 정작 문제의 Bottleneck이 다른 곳에 있더라도, (당연한 얘기지만) 회사 서비스 영역 안에서만 해결책을 제시한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좋은 조건의 회사에서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회사의 이름값을 좇기보다는, 내게 맞는 일을 계속해서 찾아가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는 것이 커리어를 만들어가는데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당장의 취업이 목적이 아니라 그 취업을 통해서 나와 맞는 일을 찾아가는 과정.
나와 맞는 일이 꼭 높은 연봉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 목적이라면 삼성전자 독일 법인에서 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선택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돈이나 회사의 이름보다는 내 역량에 집중하자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독일뿐 아니라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는 곳도 많으니 독일을 꼭 집을 수는 없지만, 많은 돈이 없어도, 당장 일을 하지 않는 다고 해서,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크게 지장이 없도록 만들어져 있는 사회의 시스템 덕분에 커리어적으로도 이런 여유가 가능한 것일 수 있다. 내가 아직 한국에 있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마 이직은 여전히 생각만 하고 있었을 것이고, 내년 차장 진급을 앞두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차장이 될 나이가 된 것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조금 더 자유롭게, 조금 더 크게 볼 수 있게 된 지금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지금 있는 세 번째 회사에서 하나 더 얻은 소득이 있다면 회사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회사를 그만 두면 무슨 일을 하고 먹고살지 하는 걱정이 들지 않는다. 어디서든 일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 이제 내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 스스로 통찰력이 생겼다고 말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산업군 별로 업종별로 접근법이 달라야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항상 할 수 있다는 것. 아마 내 다음 단계는 실패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자만에 빠져있으니 일단 몇 번의 실패를 할 것은 뻔히 보이고, 그래도 딛고 일어난다면 뭔가 이루지 않을까.
아무튼 솔직한 면담은 잘 끝났고, 이 좋은 회사는 고맙게도 내게 맞는 업무를 찾아주려고 또 애를 쓴다. 그래도 나는 당장은 아니지만, 좀 더 계획이 구체적이 되면 몇 번의 실패를 하러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