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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시스 May 01. 2020

일상에서 만난 아이히만

사회복지의 [악의 평범성]에 관하여

나는 무죄입니다

  1961년 4월 11일,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법정에서 진행된 나치독일의 전범 재판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된다. 피고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Holocaust)의 핵심인물로 손꼽히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 사람들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 부소장을 지낸 아이히만이 엄청나게 극악무도하고 악마의 형상을 한 사람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TV앞에 모습을 드러낸 아이히만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수백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주범이라고는 상상도 안될 만큼 너무나도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이히만. 그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시종일관 무죄를 주장해서 전 세계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단 한사람도 내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습니다. 내 권한이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습니다. 크건 작건 어떤 상급자의 지시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나의 행동이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닙니다.”
▲ 공개재판을 받는 아이히만의 실제 모습  ⓒ gettyimages

  종전 후 아이히만은 15년 동안이나 도피생활을 하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서 붙잡혀 살인과 학살, 전쟁범죄 등 15가지의 죄목으로 예루살렘 법정에 섰다. 애초부터 그의 재판이 자국(독일)이 아닌 예루살렘 법정에서 진행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평범한 외모와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무죄를 주장하는 아이히만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어쩐지 재판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無思惟)

  재판은 8개월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방청하는 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떠났고, 아이히만도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하지만 아이히만이 최종판결(사형)을 받을 때까지 끝까지 자리에 남아 재판을 지켜 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이히만과 동갑내기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였다. 아렌트는 재판이 끝나고 3년 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 1963)』이라는 한 권의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오늘날까지도 명저로 평가받고 있는 스테디셀러가 됐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책의 부제(副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름하야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다.


  아렌트는 예루살렘 법정에서 만난 아이히만을 쭉 지켜보면서 “그는 사적으로는 가정에 충실하고 공적으로는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평범한 시민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젊은 시절 아이히만은 이상주의자였다. 평범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그 평범함을 벗어나기를 꿈꾸면서 산 사람이 아이히만이다. 그래서 자신은 성공과 출세를 위해 좋은 사회의 좋은 시민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이라고 당연한 듯 말한다. 아마도 수백 명의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가두고 무참하게 학살한 그날 밤에도 그는 사랑하는 가족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아이히만이 일상에서 보여준 평범함과 관료적 성실함은 그를 무조건 나쁜 인간으로 일컫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아렌트는 이러한 인간의 평범함에서 나타나는 선악 구분의 어려움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악의 평범성’을 통해 아이히만은 지나간 인간이 아니라 그의 성격과 사고방식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아이히만이 재판기간 내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아렌트는 그가 명백하게 유죄인 이유를 “그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하고, 성실한 시민으로서 조직의 명령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정당한 건지 부당한 건지, 사고하고 판단할 수 없는 무능력 즉, 무사유(無思惟)가 악의 근원(뿌리)이라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사유 능력이 부족해서 자신의 모순적인 행동을 파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능력도 철저하게 상실했다. 또한 사유 능력의 결핍은 반성 능력의 결핍으로 보편화되고 일상생활에서 순식간에 엄청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결과적으로 한 평범한 인간의 무사유(생각없음)로 인해 수백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사회복지사의 일상에서 만난 아이히만

  나는 평범한 사회복지사다. 어쩌다 제주도에 내려와 비범(非凡)한 척 나대다가 지금은 비록 백수가 되었지만, 적어도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원래 누구보다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평범한 인간, 사유하지 않고 그래서 딱히 반성할 일도 없는 그런 평범한 인간. 성공과 출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이 평범함을 벗어나려 (좋은 사회의 좋은 시민으로서) 성실하고 충직하게 살아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고 잠자고....... 1년 내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단순히 살아있다는 의식조차 하기 힘든 삶인데, 하물며 무턱대고 하늘을 우러러 사유(思惟)하기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결국 나 또한 지난날의 삶이 하루하루 무사유의 삶이었다는 것을 딱히 부인할 수가 없다.


  나는 왠지 그 옛날 아이히만의 일상적인 삶이 낯설지가 않다.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 많이 닮아있다. 오늘날에도 공무원과 같은 관료적인 조직(feat. 사회복지)에서는 아이히만과 같은 일상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충직한 관료인 사람은 국가가 요구하는 명령과 법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이는 한 개인으로서 성공과 출세를 위한 기본자세이기도 하지만, 국가법이 지닌 정당성 때문이기도 하다. 그걸 뭐라고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속한 사회복지조직이 언제부터 관료화되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사회복지사는 공무원도 아닌데 마치 공무원처럼 관료조직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스스로 자율성과 주체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나 역시도 그동안 사회복지가 무엇인지, 이 일을 왜 하는지, 이게 맞는 건지, 사회복지에 대한 일말의 철학도, 사유(思惟)도 없이 그저 위(?)에서―상급자나 담당공무원쯤 되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매뉴얼대로) 꼭두각시처럼 일해 왔다. 이 또한 매뉴얼이 지닌 정당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미 무감각해져 버리긴 했지만) 우리는 일상을 구성하는 문명적 조건―조직을 이루고 작동하는 시스템 전체가 조직의 이익(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조건―으로 인해 그렇게 조직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도덕적으로 아무 거리낌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요즘 가끔 SNS를 통해 사회복지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비리와 조직문제들이 올라온 것을 볼 때가 있다. 대부분 이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새내기들이 불합리한 현실을 토로하는 내용들이 많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영 시큰둥하다. 마음으로는 공감하는지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좋아요’가 별로 없다. 후배들이 양심에 따라 용기를 내서 한 행동인데 선배들이 봤을 때는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몰라서 오바(?)하는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그런 따위의 ―사소한 것까지 치면 끝도 없는― 문제들은 이 바닥에서는 아주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 마음 나도 잘 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갑질과 상급자의 일탈(?)행위, 보조금관련 비리, 업무실적 및 문서조작, 인권문제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만큼 사회복지에서 악은 언제나 우리와 같은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사회복지 조직의 얼굴 없는 관료주의와 악의 평범함을 묵과하고 간과해서 생긴 사회복지사들의 무사유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나는 두렵다. 무사유가 팽배한 현실 속에서 오늘도 좋은 시민으로서 성실하고 충직하게 살아가는 사회복지사들의 일상이.......


  “월급을 받으면서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한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는지 판사가 묻자 아이히만은 이렇게 대답한다. 너무나도 평범한, 그래서 아무런 사유가 없는 아이히만의 모습에 2020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된다. 누가 과연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사유하지 않아서 반성도 없는 나의 평범한 일상이 어느 날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는 평범함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이 쉽게 오질 않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나치 치하에서 유대인 학살 임무를 맡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전범(戰犯)이기도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수행했던 엘리트 관료이자 평범한 아빠, 자상한 남편, 충실한 직장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부재의 실재
  이 세상이 무언가로 빈틈없이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주위는 공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한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물속에 생긴 거품을 보면 거품이라는 존재가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거품 안에는 공기가 있지만, 공기 자체는 원래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거품 속 공기와 물의 경계, 즉 물의 부재다. 물의 부재로 만들어진 거품은 이제 그 자체로 존재가 되어 마치 실재인 듯 물속을 움직이고 다닌다.
- 김상욱의 과학공부 中

  부재는 그 자체로 실체이다. 어둠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부재한 것이다. 만약 우리의 일상이 악(惡)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악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다. 일상에서 악의 평범함은 곧 사유(思惟)의 부재를 의미한다. 사유의 부재로 인해 가득 채워진 악은 마치 실재인 듯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더더욱 필요한 것이 철학이 아닐까 싶다. 철학은 바로 살아있는 사유의 활동이고 삶의 반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사유는 곧 인간존재의 이유다.  


... 그래서 가끔 하늘을 보자... 알쓸복잡


※참고문헌

1. 성실한 그대여, 언제나 학살자가 될 수 있다네!, 이정은(연세대학교 외래교수), 『철학자의 서재2』

2. 악의 평범성’ 다시 들여다보기, 김선욱(숭실대학교 철학과 교수), 「경희대학교 대학원보」


“그(아이히만)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 한나 아렌트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 ⓒ New York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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