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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Jun 19. 2017

아이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글쓰기

1학년 아이들 정체성을 세우고 자존감을 키우는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를 알아가는 사색을 경험하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일"


타인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을 들여다보는 연습을 1학년 수준에서 해 보는 거지요.

내 감정, 내 생각, 내 의견은 어떤 것인지를 확인해 보고 표현하는 건데,

내 모든 건 사적인 것이고, 그래서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 가치를 지닙니다.

그래서 소중하지요. 이 순간을 따서 그림일기장에 기록합니다.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겠다고 아이들에게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의 글을 보니 다양합니다.


아이1 : 교수 할아버지 할머니와 팥빙수 먹은 일(특히 기억나는 건 팥빙수)

아이2 : 빵 먹은 일(맛있었지만 너무 달아서 자주 먹고 싶지는 않다는)

아이3 : 혼자 집에 있었던 일(외로웠지만 참았다는 내용)

아이4 : 어제 선생님이 읽어주신 동화책이 재미있었다는







이 중에서 한 아이의 글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아이고, 요 녀석. 빨리 쓰고 나가 놀고 싶어서 그림과 글씨가 막 날아다니지요?

하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섬세하고 풍부한 감수성과 그걸 표현하는 대담함이 놀랍습니다.

제가 쓰게 하고 싶은 글쓰기가 이런 글입니다.

아이가 자기 감정을 알고 그 감정에 대해 독립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하는(외로웠다는, 하지만 눈물을 참았다는) 글쓰기 말입니다.


<나는 집에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기분이 외로웠다

눈물이 날라고 했는데 참았다>


이 아이의 글엔 어떤 직유와 은유도 없습니다.

독자의 감정을 유도하는 그 어떤 수사도 없습니다.

그런데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할 것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여덟 살의 외로움을 묵묵히 표현했습니다.

물론 이 글이 나오기까지 제가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처음에 아이는 첫 줄만 써 왔더군요.

첫 줄 글씨를 보시면 뒤로 갈수록 글씨가 급하고 커진 게 보이시죠?

빨리 나가 놀고 싶어서 마구 흘린 겁니다.


나 : 집에 있었어? 뭐 했어?

아이 : 가만히 있었죠. 그냥. 그냥 있었어요.('그냥'을 강조함)

나 : 그럼 그것도 써 볼까?

아이 : (귀찮다는 듯 짜증을 내며 휘리릭 쓴다.) 됐죠? 저 이제 나가요.

나 : 근데 기분은 어땠어?

아이 : 기분이 외롭지 어떻긴 어때요. 우리 집에 나랑 딸랑이(강아지 이름) 밖에 없었거든요.

나 : 그럼 외로웠다는 것도 써 보자.

아이 : 에이 참. 빨리 나가야 되는데... (기분이 외로웠다고 쓰면서) 근데 눈물이 날라 그랬어요. 그것도 써요?

나 : 헉. 왜 눈물이 났어? 딸랑이가 깨물었구나?

아이 : 아뇨. 엄마가 나만 놔두고 채영이(동생)만 데리고 하우스 가니깐 그렇죠.

나 : 헐. 너네 엄마 나쁘다. 널 왜 떼어 놓고 가? 선생님이 전화 걸어서 한 마디 해야 되겠네.

아이 : 채영이는 아직 다섯 살이니깐 그렇죠. 혼자 놔두면 막 우니깐요. 근데 저 눈물 안 났어요. 참었어요.


저와 아이의 대화를 보면 이 시가 더 이해가 다가옵니다.

아이는 동생에게 엄마를 빼앗기고 허전한 마음을 글로 쓴 거군요.

저는 한 발 더 나가 이왕이면 엄마가 동생만 데리고 갔다는 내용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꼬드겨 보려는데,

아이는 한사코 싫다고 합니다. 어린 동생이 엄마 사랑을 더 받는 걸 머리로는 이해 하지만 가슴으로 인정하기는 아직 어린가 봅니다.


아이가 글을 지을 때, 교사가 거든다고 모든 아이들이 다 이런 글을 짓는 건 아닙니다.

수동적인 성격의 아이에게는 이런 글을 얻어내기 힘듭니다.

수동적인 아이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까지만 잘 합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객관 속에 자신의 감정이나 견해를 투사하는 걸 잘 안 하지요.

못하는 게 아니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그렇다 보니 안 하게 되고, 안 하다 보니 못합니다.

수동적인 아이는 과잉보호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아이가 뭔가 부족해서 수동적일 거라고 미뤄 짐작하거든요.

과잉보호를 받는 아이는 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래야 편하니까요.

수동적인 아이를 과보호를 통해 적극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그래서 위험합니다.


이 아이의 이런 글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나오는 글입니다.

혼자 있다는 자각, 외롭다고 느끼는 자신을 타자화 시킬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이건 자의식이 생긴 다음에 일어나는 건데 아이는 벌써 이 단계에 와 있는 걸까요? 무엇이 아이의 감성을 이렇게 키웠을지 궁금합니다.


보통 1학년 아이들의 글은 상황을 기술하는 수준입니다.

길이도 비슷하고, 내용도 그렇습니다.

1학년은 글쓰기의 시작 단계라 그런지 사실 위주의 글입니다. 감성은 적고 건조하지요.

이런 글을 감성적으로 바꿔가는 게 이 글쓰기의 목표입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까닭은,

각 가정에서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을 지금처럼 항상  존중해주십사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자기 감정이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낄 겁니다.

그래야 자기 감정을 더 자신 있게 드러내거든요.

그 감정을 꺼내서 살펴보고 대처하는 연습이 글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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