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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Sep 18. 2017

아이들의 글씨 연습


한 아이가 글씨 학습지를 저에게 툭 던지며 한 마디 합니다.


"선생님, 나 이런 거 쓰기 싫단 말이에요. 그냥 '우유, 가지'이런 걸 쓰라 그러지 왜 이렇게 힘든 걸 쓰라 그래요."


"아니... 뭐, 니네가 글씨 공부를 해야 니네가 책도 잘 읽고 공부도 잘 하니깐..."


아이의 기세가 범상치 않게 보여 제가 우물우물 하니 아이는 오른손을 쫙 펴 내밀며 한 술 더 뜹니다.


"내 손 좀 봐요. 땀났죠? 얼마나 힘들면 땀나겠어요? 나 이런 거 안 써도 글씨 읽는 단 말이에요. 아이, 씨. 이거 쓰느라 팔 아퍼 죽는 줄 알았네."


"아니... 그래도 조금만 더 쓰지... 거의 다 했네... 그나저나 글씨 참 이쁘게 잘 썼네."


"글씨 막 쓰면 선생님이 또 쓰라 그러니깐 내가 엄청 천천히 쓰느라 내 팔이 떨어질라 그런다니깐요. 선생님도 한 번 써 봐요. 진짜 땀난 거 보구선 왜 그래요."



겹자음. 1학년 국어책에 이렇게 어려운 글자가 나옵니다.

글씨를 모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글자를 읽고 제법 쓰기까지 하는 걸 보면 한글이 그만큼 쉽다는 뜻이겠고 아이들의 습득 능력이 뛰어나다는 증거겠지요.

받침이 없이 소리 나는 대로 쓰기만 하면 되는 글자들은 아이들이 금세 익히는데 받침이 들어간 글자는 쓸 때와 읽을 때 다르게 소리 나기 때문에(연음법칙, 자음동화 같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평소 책을 좀 읽은 경우라면 겹자음을 자연스레 익히지만 책과 거리가 있는 아이라면 더 어려울 겁니다.

이런 글자를 공부할 때마다 아이들은 표정이 울상입니다. 짜증도 내고요. 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손에서 땀이 막 난다, 손이 너무 힘들어서 왼손으로 쓰겠다. 글자는 왜 이리 힘드냐, 학교를 끊겠다는 협박까지 ㅋ

교과서에는 두세 번만 쓰고 읽어보라고 나오고 끝이니 교실에서는 아이가 다 익힐 때까지 반복해서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쓰라고 하면 아이들도 싫어하고 싫은 상태에서 쓰는 게 머리에 들어갈 리 없으니 저는 저대로 술수를 씁니다.


우선 이런 학습지를 한 장씩 나눠주고 쓰게 합니다.

써서 가져오면 글씨 모양을 트집 잡아 한 장 더 줍니다.

이 상황에서 아이들의 불쾌지수가 올라갑니다.

달래고 무마하면서 한 번을 더 쓰게 한 뒤 뒷면에 안 보고 받아쓰기를 하게 합니다.

받아쓰기에 틀린 문제는 그 옆에 세 번씩 더 쓰게 합니다.

두 시간쯤 뒤에 받아쓰기를 한 번 더 합니다. 틀린 문제는 또 세 번씩 쓰게 합니다.

이 정도  하면 아이들이 제법 안 틀리고 씁니다.


그리고 집에서 부모님과 받아쓰기를 한 번 더 하도록 숙제를 냅니다.

결국 아이들은 같은 글자를 열 번을 넘게 써야 머릿속에 겹받침의 개념이 잡히는 셈입니다. 물론 다음 날 다시 받아쓰기를 해서 확인하면 70% 정도는 틀립니다.

이런 식으로 글자를 달리해서 매일 반복합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끊고 싶을만합니다.


아이들 또한 이렇게 힘든 글씨 연습을 하면서 자기들 나름의 꾀를 냅니다.

낱말을 차례로 낱말 단위로 쓰지 않고 한 글자씩 쓰는 거지요.

심지어는 글자 안에서도 초성+중성과 받침을 따로 쓰기도 합니다.('넓다'의 경우 '너'와 'ㄼ'을 따로 쓰는군요).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이렇게 쓰면 더 빨리 끝내는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쓰는 과정도 좀 덜 지루하고요.

다만 글씨 공부 효과는 떨어지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면 모른 척 그냥 두기도 합니다.

어쨌든 아이들은 받침을 쓰면서 이 글자는 겹받침이 있구나, 생각을 할 테니까요.

이래저래 아이들에게 글씨 공부는 그 어떤 노동보다 쉽거나 대수롭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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