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아이가 너무 숨 가빠하길래 차분한 놀이로 바꾸라고 말하는데, 한 아이가 무슨 고급 정보라도 아는 양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선생님, 밖에 나가실 때 조심하세요. 울 엄마가 그러는데 신천지 만나면 바이러스 옮는 댔다니깐요. 글쎄!"
그러자 옆 아이도 거든다.
"맞아. 신천지 때문에 바이러스 엄청 퍼졌잖아. 우리 동네에도 있대요. 우리 엄마가 봤대요. 하마터면 끌려갈 뻔했대요."
다른 아이도 말한다.
"어휴, 짜증 나. 신천지 새끼들은 왜 바이러스가 많냐."
그러자 처음 말한 아이가 한 마디 한다.
"야, 너 왜 욕해. 신천지한테 걸리면 디질라구그러냐."
"야, 괜찮아. 신천지 땜에 바이러스 먹은 사람들 엄청 많잖아."
"야, 그래도 욕하면 안 되지. 그쵸, 선생님?"
화제가 바이러스에서 어른에게 욕을 해도 되는지로 옮겨갔다.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고민하는데 처음 말한 그 아이가 다른 화제를 꺼낸다.
"야, 쭝국(중국) 놈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들이 박쥐를 먹어서 바이러스가 터진 거야."
그러자 주변 아이들이 앞다퉈 대화를 부풀려간다.
"쭝국 사람은 이상한 것도 다 먹어."
"야, 거미도 먹고 지네도 다 먹어. 내가 쭝국 가서 시장 갔단 말이야. 별거 별거 다 먹어. 근데 엄청 징그러워. 우웩, 퉤!"
"너도 먹었잖아. 지가 지난번에 자랑해 놓구선."
"야, 나 안 먹었거든!"
"야, 너 매미 먹었대매. 지가 그러구선."
"야, 매미는 안 징그러우니깐 먹었지. 선생님, 매미는 안 징그럽죠, 맞죠?"
내가 별 반응을 안 보이자 한 아이가 답답하다는 듯 친절하게 설명을 한다.
"선생님, 잘 들어 봐요. 네? 신천지 사람들이 바이러스 먹고 막 소리 지르면서 기도하는 거 봤죠? 테레비에 나왔잖아요. 그래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걸렸잖아요. 근데 집에 가면 가족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럼 다 옮겠죠? 그 가족이 또 다른 가족한테 옮기죠. 그 사람들이 신천지 안 갔으면 바이러스에 안 걸리죠. 근데 우리 동네에도 신천지가 있대요. 그런 사람들한테 걸리면 깨꾸닥(죽는 다는 의미)이죠."
*
어른들이 뉴스를 보고 무심코 한마디 뱉었겠지.
바이러스가 퍼지는직간접 매개가 된 대상을 비난하게 되는 건 공포때문이겠고, 대부분 사람들이 뉴스를 받아들이는 방법일 것이다.
문제는 아이들의 이해 수준이 어른에 못 미친 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뉴스의 맥락을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뉴스의 맥락을 짚어 상세한 진실에까지는 접근하지 못한다.
어른을 위한 뉴스가 한차례 지나가고 결국 아이들에게 남은 건 과정과 이유가 제거된 혐오 감정뿐.
아직 사고의 폭이 좁은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혐오의 감정은 이렇게 위험하다.
어른들은 어떤 대상이나 현상에 대해 무심코 자기 생각을 말할 때 아이가 옆에 있다는 걸 잊는다.
그런 대화를 어렴풋이 들은 아이들은 자기의 이해 수준만큼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장님의 눈이 되어 코끼리를 만지는 셈이 된다.
이럴 때 아이들이 먼저 받아들이는 건 논리가 아니라 어른의 감정인 것 같다.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어른들의 대화에서 본 표정이나 말투는 그리 곱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도 엄마처럼 어른인 척하기 위해, 또는 엄마와 한 편임을 드러내고 싶어서 어른의 생각에 적극 동조한다.
결국 <우리 엄마가 봤다는> 신천지에 대한 혐오 감정을 거리낌 없이 획득한다.
아이의 감정은 대부분 이렇게 만들어진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아이의 혐오는 어른의 그것에 비해 가볍고 위태로워서
쉽게 대상이 바뀌어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천지 새끼>, <쭝국놈>이라는 욕을 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킬킬거림으로써 더 강한 욕을 하도록 서로 부추기기도 한다.
마땅히 욕먹어도 되는 대상을 향해 욕을 하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같기도 하다.
이쯤 되면 그들이 왜 욕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지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수가 소수를 핍박할 때 흔히 재현되는 방식 아닌가?
자신들이 재판으로 시비를 가릴 수도 없고 물리적인 체벌을 하기엔 힘이 약하니 욕이라도 하는 것.
아이들의 욕은 사악한 무엇에 대한 아이들의 처벌 방식인 셈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혐오와 혐오 대상을 향한 응징 욕망이 응집되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도 이미 우리는 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일제의 관동대학살.
돌이킬 때마다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사악해질 수 있겠느냐고 진저리 치는 그것.
인종과 국가를 가리지 않는 무서운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런 상황까지는 미리 계산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현재로선 중국에서 바이러스가 시작되었다는 해석이 유력하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신천지가 폭발 감염의 매개가 된 것이 사실이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감염자가 나온 것도 사실이다.
이 상황을 좀 더 담담하게 설명해 준다면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중국 대신 다른 지역(나라)에서 발생할 수도 있고
사회의 방역 체계에 따라 신천지가 아닌 다른 모임에서도 집단발병은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우선은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의 한계를 부모가 알아야 할 것인데
평소 대화가 잘 되는 가정은 이런 대화가 더 쉬울 것이다.
그런 아이는 혐오라는 공포에서 벗어나 좀 더 의연하게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겪어낼 수 있지 않을까.
아이와 함께 뉴스를 보고도 어른의 감정만 표현하고 끝난다면,
아이에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정도 소통 경험이 없는 가정의 아이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불안을 이기기 위해 아이가 욕을 뱉어서라도 신천지와 중국을 이겨보려고 하는 건 자연스러운 불안 해소법이 아닐까.
지금 저 아이들 표정에 배인 혐오는 바이러스가 진정된 이후에도 한동안 남겠지.
만연해진 혐오를 바로잡고 교육해야 하는 과제가 선생인 내게 남아 있다.
머잖아 온라인 개학을 하면 무엇보다 우선 가르쳐 할 것이다.
혐오의 낙인을 거두고 그 촘촘한 발생 과정을 아이들로 하여금 들여다보게 하는 일.
혼내 줘야 할 대상도 있네.
혐오와 공포를 조장한 언론, 방역 당국의 노력을 허탈하게 만든 개인과 집단.
또 칭찬하고 본받아야 할 것들도 있겠다.
다른 사람을 구하려 자신을 희생한 의료진, 자기 것을 아낌없이 나눈 여러 의인들.
끝없이 비아냥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언젠가 진실을 알아줄 거라 믿고 꾸준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간 공직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