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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Oct 05. 2021

1학년 아이들이 공부에 재미를 느끼는 순간

여덟살 인류





1학년 교육과정은 공부라는 느낌이 거의 없다. 말하고, 듣고, 쓰고(국어), 색연필이나 싸인펜으로 그리고, 가위로 오리고, 풀로 붙이고, 뛰고, 놀이하고(즐거운 생활), 같이 어울리고, 공감하고, 판단하고(바른생활), 알아보고, 따지고, 시비거는(슬기로운생활,) 활동으로 채워져 있다. 공부에 대한 부담을 줄이면서 자연스럽게 지식을 드러내게 하려는 의도다.


그런데 아이들은 자꾸 '공부는 언제 하느냐'고 묻는다. 자기들은 공부를 하러 학교에 왔고, 공부를 열심히 할 건데 선생님은 왜 공부는 안 시키고 놀이를 하냐고 따진다. 자기는 이미 공부 할만 큼 컸다고, 나름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공부'라는 말을 많이 쓴다. 화장실 가기 공부. 물 먹기 공부. 장난감 정리 공부. 급식 공부.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가는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말하지 않아도 줄을 서려고 하고 급식실에 밥 먹으러 가는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평소보다 더 깨끗이 먹으려 애쓴다.


덕분에 아이들은 공부가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한 발 더 나아가 이런 저런 주제로 발표할 일을 만들어 한 명씩 앞에 나와 말하게 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듣는 연습도 '공부'라는 이름으로 한다(발표습관 기르기, 학습 호기심 갖기). 아이들은 제시된 주제에 따라 재잘재잘, 아기새처럼 종일 떠든다.


이런 활동에서 빛나는 아이는 말을 잘하는 아이다. 보고 들어 아는 것들을 말로 풀어낼 줄 아는 아이. 친구들의 대화 분위기를 이끈다. 당연히 동경의 대상이 되고 인기를 얻어 학급의 분위기를 이끄는 아이가 된다. 모든 학부모의 이상적인 아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아이 뿐 아니라 나머지 아이들도 이런 아이로 키워야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아이들은 똑똑한 아이를 부러워 할 뿐, 자기도 그런 아이가 되려는 생각은 잘 하지 않기때문이다. 대화에 뛰어들어 말을 해야 실력이 늘텐데 피하려고만 한다. 이런 아이를 격려하고 부추겨 소수의 똑똑한 아이를 상대로 당당히 논쟁하게 만드는 역할이 담임 몫이다.


한 아이가 어떤 말을 하면 다른 아이는 질문을 하게 해보았다. 질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논쟁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1학년 아이의 질문은 두서가 없고 엉뚱하기 마련이어서 대화가 잘 이어지기 어렵다. 아이들이 하는 질문은 대체로 시비걸기에 가깝다. 일단 시비가 걸리면 상대는 지지 않기 위해 온힘을 다해 방어한다. 더 정확한 지식이나 논리를 끌어오는 것이다. 옆에서 보면 자못 치열한데, 이 과정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3월 한 달 정도 공을 들인 결과, 아이들 모두 대화를 피하지 않고 저마다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똑똑한 아이라고 해도 한 명이 대화를 오래 끌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의 질문(시비 걸기) 견제 때문이다.


아이1 : 니네 우사에 소 몇 마리 있어?


아이2 : 128마리. 근데 토요일 되면 129마리가 될 수도 있어.


아이1 : 왜?


아이2 : 송아지가 곧 나오거든.


아이3 : <공격>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송아지가 토요일에 나오는지 어떻게 아냐?


아이2 : <방어> 우리 아빠가 그랬어.


아이3 : <공격> 그게 정확하지는 않잖아. 일요일에 태어날 수도 있고.


아이2 : <방어> 아니야. 우리 아빤 틀린 적 없어.


아이3 : <공격> 야, 사람이 어떻게 안 틀리냐? 니네 아빠가 컴퓨터냐?


아이2 : <방어> 우리 아빠가 배웠으니깐 안 틀리지.


아이3 : <공격> 그래도 사람이 항상 정확할 수는 없어. 엄마 소가 알아서 낳느냐, 안 낳느냐에 따라 다를 테니까.


어른의 대화에선 쉽게 넘어 갈 것도 아이들의 대화에서는 사사건건 걸린다. 타고난 경쟁심 때문일까, 아이들은 아직 자기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3월 한 달 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가장 똑똑하다고 세뇌시켰다) 친구의 독주를 두고 보지 않는다. 똑똑한 소수가 대화를 독점하고 교실 분위기를 좌지우지하지 않게 되니 대화는 더 풍성해진다. 대신 대화가 매끄럽지 못할 때가 많다. 가끔 논쟁이 격해져 감정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살짝 끼어들어 대화의 전환을 유도하거나 다툼을 말려준다.


아이2 : 근데 토요일에 태어날 가능성이 엄청 높아. 지난 번에도 우리 아빠가 날짜를 딱 맞췄거든.


아이3 : 야, 잘난척하지마. 니네 아빠가 틀리면 어쩔건데?


아이2 : 안 틀리거든! 니네 아빠는 틀릴지 몰라도. 우리 아빤 안 틀려.


아이3 : 우리 아빠는 소 안키워. 택시 운전하잖아.


아이2 : 야, 그러면 니네 아빠는 택시 운전할 때 사고 안 나냐?


아이3 : 누가 사고 안 난대?



(대화가 맥락을 잃고 감정다툼으로 빠지려고 한다. 이럴 때는 살짝 방향을 틀어준다.)



나 : 얘들아, 근데... 송아지는 알에서 태어나지? 근데 무슨 알이더라?


아이들 : (일제히 나를 돌아보며)  : 헐. 송아지가 알에서 태어난다고요? 에이, 그건 아니죠.


나 : 아니야? 병아리도 알에서 태어나잖아. 계란. 계란은 한 판에 팔천원. 계란은 맛있어.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배를 만지며) 아, 배고프다. 근데 오늘 급식 메뉴가 뭐더라?


아이2 : 아, 진짜! 선생님은 맨날 먹는 얘기만 할라 그래요?


나 : 배고프잖어. 오늘 메뉴가  뭐더라? 계란찜 나오면 좋겠네. 아님 치킨. 냠냠.


아이5 : 아, 선생님 땜에 나도 배고프잖아요.


나 : 나도. 계란 후라이 먹고 싶다. 그치?


아이3 : (진지한 목소리로) 선생님, 송아지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요. 제가 봤어요.


나 : 아깝다. 알에서 태어나면 그 알이 엄청 클 거잖아. 그걸로 후라이를 해먹으면 우리 반 다 먹을 텐데.


아이2 : 헐. 소는 포유류잖아요. 포유류는 새끼로 태어나요.


아이3 : (한 발 나서며) 젖을 먹어서 포유류야. 책에 나와.


아이2 : (한 발 더 나서며) 포유류는 척추동물이야. 내 책에는 그런 내용도 있어.


아이3 : 척추동물 아니야. 포유류라니까. 맞죠, 선생님?


나 : 포유류? 그게 뭔데? 포알라 말하는 거 아냐?


아이1 : 으이구. 포알라 아니고 코알라죠.


나 :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가? 코알라. 알려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코알라한테 혼날 뻔 했네. 히힛.


아이2 : 선생님, 소가 척추동물 맞죠? 제가 책에서 봤는데 척추동물이라고 써 있고 소랑 북극곰 그림이 있거든요.


나 : 그럼 맞겠네. 책에 나왔다며.


아이3 : 책을 잘못 봤을 수도 있죠. 한 번 보고 어떻게 알아요?


나 :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책은 여러 번 봐야 더 정확하지.


아이2 : 그러니깐 지금 선생님이 딱 말해주면 되잖아요.


나 : 그래? 그럼 내가 소한테 물어봐야겠네. 전화를 걸어볼까?


아이1 : 선생님, 또 몰르니깐 그러죠? 과테말라도 모르고 자알 한다! 자꾸 모르면 어쩔라 그래요? 으이구, 속 터져.


아이4 : (아이1을 나무라며) 야, 선생님이 모를 수도 있지. 너 왜 싸가지 없게 말해. 엉?


아이1 : 선생님이 너무 모르니까 그렇지. 야, 우리 공부는 망했다. 선생님도 모르는데 누구한테 배우냐?


아이4 : 야, 선생님도 앞으로 책을 읽으신대잖아. 그럼 똑똑해져서 우리한테 공부 가르쳐 주시겠지. 맞죠, 선생님?


아이1 : (가방을 내던지며) 에잇, 학교 괜히 왔어. 엄마한테 학교 끊어달라 그러든지 해야지.


아이들이 다투자 내가 또 개입해서 상황을 바꾼다.


"아, 그러면 선생님이 직접 소한테 물어볼게. (전화기를 꺼내 전화 거는 척을 하며 음매, 음매 소 흉내를 낸다.)


아이1 : 소가 어떻게 전화를 받아요. 말도 못하는데.


나 : 그런가? 그럼 척추동물이 뭔지 어디에 물어보지? 큰일이네. 교무실 가서 물어보고 올까?


아이4 : 안돼요. 거기 가서 물어보시면 다른 선생님이 그것도 모른다고 흉보면 어쩔라 그래요? 창피하게.


나 : 아, 그런가? 알려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창피할 뻔 했네.


아이2 : 하루만 기다리세요. 야, 니들도 하루만 기다려. 우리 집에 척추동물, 무척추 동물 책 있거든. 내일 가지고 와서 보여줄게.






다음날 아침, 아이가 들고 온 책 주변에 아이들이 모여든다. 잠시 후, 일일이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어가며 더듬더듬 페이지를 넘기더니 소 그림이 척추동물 칸에 있는 걸 확인한다. 책 주인은 어제의 설움을 갚기라도 하듯 호기롭게 말한다.


아이2 : 봐, 내 말이 맞지? 척추동물에 소 있잖아.


아이3 : 응. 인정!


논쟁 끝. 결말은 대체로 싱겁다. 이긴 아이 아이의 호기로움이나 진 아이의 분함도 보이지 않는다. 승부에 대해 따지려고도 안 한다. 승부욕은 있지만, 아직 논쟁에서까지 이기고 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확인이 끝나자 책 주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방에 책을 다시 넣고 아이들의 관심은 놀이로 순식간에 돌아간다. 아직까지는 놀이를 위한 선의의 경쟁 같다. 내 마음 같아서는 책을 편 김에 무척추동물에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는데. 그래서 내가 궁색하게 말을 이어가 보지만...


나 : 근데 무척추동물은 또 뭐야? 꽃게 그림이 있는 거 보니 먹는 거 같은데... ( 아이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사슴벌레를 가리키며) 근데 사슴 벌레도 무척추동물이네? 이건 어떻게 먹지? 튀김으로 먹나?


아이2 : (책을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내 책상에 툭 던지며) 궁금하세요? 그럼 선생님이 읽어보세요. 야, 우리 그네 타러 가자!


아이고, 아직은 1학년인지라. 나는 어정쩡하게 책을 받아 들고,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복도로 내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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