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일학년담임 Oct 08. 2021

우리 할머니는 지랄한다는 말 엄청 잘 해.

아이들이 어른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법

1학년 아이들은 자기가 공부를 아주 잘한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쉬워서다. 입학 전에 한글을 몰랐어도 몇 달만 배우면 여름방학이 시작하기 전에 더듬더듬 읽을 수 있을 만큼 쉬운 한글 덕분이기도 하고 열까지 세거나 수로 쓸 수 있으면 되는 쉬운 난이도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의 넘치는(?) 호기로움을 이용해 공부로 유도한다. 자주 쓰는 방법은 퀴즈대회다. 아이들이 알만한 문제를 주로 내다보니 아이들은 퀴즈를 놀이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틈만 나면 퀴즈를 내보라고 조른다.


나 : 좋아. 엄청 어려운 문제를 내겠어!


아이들 : 설마 2학년 형님들이 아는 문제를 낼 건 아니죠?


나 : 흐음. 3학년 형님도 모를 문제를 낼 거야.


아이들 : (꺅꺅 엄살을 떨며) 아유, 그렇게 어려운 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나 : 선생님 마음이야. (비장한 표정으로 양팔을 펄럭거리며) 잘 봐! 이렇게 날개를 쫙 펴고 하늘에 떠 있다가 뱀이나 토끼를 만나면 쏜살같이 내려와서 탁! 채가는 새는 무슨 새인가요?


아이1 : 독수리?


나 : 헉. 어떻게 알았어? 너네 아직 독수리 안 배웠잖아.


아이1 : 에이, 책에 나오잖아요. 유튜브에도 나오고.


나 : 뭐야, 3학년 보다 더 똑똑한데? 좋아, 이번엔 진짜 진짜 어려운 문제를 내겠다. 음하하! 공룡인데 하늘을 나는 공룡 이름은? 설마 이건 모르겠지?


아이2 : 정답! 프레타노돈! 맞죠?


아이1 : 땡! 야, 아니야. 프테라노돈이야. 맞죠?


나 : 프... 뭐라 그러던데?


아이2 : 분명히 말해주세요. 프레타노돈인지 프테라노돈인지. 빨랑요.


나 : 그게... 프... 프린터인가?


아이1 : 프린터는 아니죠. 프테라노돈 맞아요. 우리 집에 공룡책 있어요.


아이2 : 야, 니네 집에만 공룡책 있냐? 우리 집에도 공룡책 있어.


아이1 : 우리 공룡책은 엄청 두꺼워. 2만2천원짜리야.


아이2 : 내 책도 두꺼워. 공룡 다 나와있어.


아이1 : 뻥치시네. 어떻게 공룡이 다 나와있냐. 공룡이 얼마나 많은데.


아이2 : 공룡백과니까 그렇지.


아이1 : 야, 내 책은 공룡대백과야. 선생님, 공룡대백과가 공룡백과보다 더 큰 거죠? 큰 대(大)자가 들어갔으니깐요.


나 : 우리 학교 도서관에도 공룡 책 있던데?


아이2 : (후다닥 뛰어 나가며) 내가 가서 빌려올게요.


아이3 : 야, 공부시간에 어디 가. 쉬는 시간에 가야지. 선생님, 쟤 공부하기 싫어서 저러는 거예요.


아이들의 학습과정은 어른과 달리 경쟁과 자랑이 수반된다. 어른처럼 자아실현이나 앎에 대한 욕구를 위해 공부하는 아이는 없다. 친구보다 더 많이 알려고, 또는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자랑하려고 공부한다. 아이의 학습 과정에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이런 과정이 반복으로 경험되면 어느 순간 공부가 즐거워지고 더 알고 싶은 것들이 생기는데 나중에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이어지므로 학습을 설계할 때는 이 점을 참고해야 한다. 일학년 아이들에게 지루함은 최대의 적이다.





나 : (인터넷 검색결과를 보여주며) 아하, 여기 있다. 프테라노돈이 맞나 봐.


아이1 : 거 봐요. 내가 맞지. 프테라노돈.


아이2 : 선생님은 왜 쟤 편만 들어요. 우리 책엔 프레타노돈이라고 나와요. 진짜예요.


나 : 프테라노돈이 맞아. 집에 가서 한 번 확인해 봐. 글씨가 비슷해서 헷갈릴 수도 있어.


아이1 : 선생님, 저 엄청 유식하죠?


나 : 유식? 무슨 말인데?


아이1 : 무식한 거의 반대말이죠.


나 : 아하. 그럼 무식한 건 뭐야?


아이3 : (아이2를 가리키며) 무식한 건... 엄청 고집 쓰는 거예요. 우리 할머니처럼.


퀴즈대회를 하다가 할머니 이야기로 방향이 바뀐다. 대화를 끊고 퀴즈를 이어가려는데,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할머니?"


"네. 엄마가 그랬거든요. 우리 할머니가 고집부린다고. 무식해서 그러는 거래요."


"야, 무식하다는 말 나쁜 말이야. 맞죠, 선생님?"


"왜 나쁘다고 생각했어?"


"저도 우리 엄마가 이모랑 말하는 거 들었죠. 이모가 엄마한테 느이 시어머니가 좀 무식하잖냐, 그랬어요."


"아, 그런 일이 있었어?"


"내가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쪼끔 났단 말이에요. 그걸 보고 우리 할머니가 엄마한테 '저노무 새끼 대가리 깨질 뻔 했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깐 엄마가 할머니한테 애 앞에서 그런 욕 하지 말라그랬거든요."


"아, 그랬어?"


"그랬더니 할머니가 엄마한테 지랄염병이라 그랬잖아요."


"(다른 아이가) 헐. 쩐다. 그거 나쁜 욕이야. 선생님, 맞죠?"


"(옆 아이가) 야, 그게 무슨 욕이냐?"


"지랄 염병이 왜 욕이 아니냐? 욕 맞죠, 선생님?"


"욕하면 나쁜 사람이잖아요. 근데 우리 할머니는 좋은 사람이란 말이야."


"야, 좋으면 욕을 하지 말아야지."


"그럼 욕은 욕인데 그렇게 나쁜 욕은 아닐 걸. 우리 할머니 지랄한다는 말 엄청 잘 해."


"아하, 엄마는 할머니가 너에 대해 나쁘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나 보네. 너 편 들어주시려고."


"근데 할머니 말이 어떤 땐 맞아요. 제가 좀 지랄맞게 돌아치니깐요."


"돌아쳐??"


"말 안 듣고 나대는 거요. 우리 할머니가 맨날 그래요."


"아, 그런 말이 있었구나."


"그런데 엄마가 할머니한테 그런 말 하지 말라그랬죠."


"그랬어?"


"네, 그랬더니 할머니가 엄마한테 빽 소리를 질렀잖아요. 지랄염병이라고."


"소리를 빽?"


"네. 그래서 우리 엄마가 오늘 나 태우고 학교 오는 동안 울면서 이모한테 전화했잖아요. 그랬더니 이모가 느네 시어머니 무식하다고."


"아이고, 엄마가 속상하셨나보네."


"휴, 제가 자전거 괜히 탔잖아요. 자빠져서 무릎 까져서."


"으이구, 야, 그러깐 니가 왜 자전거를 타냐. 너 땜에 니네 엄마가 울었잖어."


"야, 난 그냥 아주 살짝만 넘어졌단 말이야. 다른 때보다 조금."


"그래도 너 때문에 할머니가 욕했잖아."


"난 그냥 자전거를 쪼끔 탈라 그런 거라구. 나 울지도 않았거든."


"그래도 앞으론 타지 말라니깐. 니네 엄마 또 울면 어쩔라고 그러냐?"


"선생님, 그럼 자전거 학교 가져와서 타도 돼요?"


"되기는 하지만... 학교에 오는 길이 위험해서 일학년은 안 돼. 그냥 집에서 타는 게 좋겠어."


"우리 할머니까 또 뭐라 그럴까 봐 그러죠."


"그럼 선생님이 할머니께 말씀드려줄까? 선생님이 말씀 드리면 들어주실 거야."


"그럼 제가 시켰다 그러지 말구요."


"(다른 아이가) 우리 할머니도 욕 잘해. 맨날 지랄한다 그러는데."


"(또 다른 아이가) 우리 할아버지도. 씨팔 씨팔 그러는데."


"근데 할머니들은 왜 욕을 해요? 사실은 착하면서. 욕만 안하면 될 거잖아요. 그럼 엄마도 뭐라 안 그러고 할머니도 소리 빽 안 질러도 되잖아요."


"아, 그러게... 근데 우리 할머니도 그러셨어."


일학년 아이들의 언어 습관을 보면 그 아이의 성장환경이 보인다. 아이는 가족의 언어를 모방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말 중에는 그 가정 만의 방언이나 비속어가 녹아 있다. 자전거를 타다 무릎이 조금 까진 일로 할머니와 엄마가 다투고 급기야 엄마가 눈물까지 흘리는 건 일학년 아이에게 당혹스러우면서도 무서운 전개다. 아이는 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는 것 같다. 엄마와 할머니의 갈등 때문에 아이는 지금 몰라도 되는 죄책감을 학습하는 것이다.


아이를 둘러싼 엄마와 할머니의 갈등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이된다. 누가 권력이 실재로 강한지, 누가 지지 않으려고 악을 쓰는지 일학년 아이들은 안다.


"우리 엄마는 할머니더러 '노인네'라그러는데."


"노인네?"


"네. 이모랑 통화할 때 그렇게 말했어요."


"노인네는 노인과 같은 말인가?"


"아니죠. 조금 더 나쁜 말이죠. '노인'이 아니라 '노인네'니까요."


아이들은 어른들이 사용하는 말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앞뒤 상황과 연결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안다. 아이가 '노인네'라는 낱말이 주는 비하감을 이해하기 까지는 그동안 누적된 고부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와 할머니는 아이에게 가장 큰 애정의 대상일 텐데, 애정의 크기만큼 아이들은 둘의 불화를 불안해한다.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자기 때문에 다투는 걸 이해하기에 일학년은 아직 어리다. 좋을 수 없는 사이라도 아이  앞에서는 좋은 척, 교양을 연기해야하는 이유다.


속어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 노인의 언어습관이 아이 교육에 안 좋다는 비판도 있다. 비속어는 주로 분노와 짜증, 단절의 감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아이들이 그런 말을 배워야 할까. 어릴 때 배우는 언어습관이 성인기의 사회성에 영향을 준다. 어른이 된 아이가 무심코 내뱉는 욕 한마디가 친밀감 대신 위협으로 느껴져 인간관계를 망가뜨리게 된다면? 그런데 그 시작이 어릴 적 들었던 할머니의 거친 말 때문이었다면...



"(다른 아이가 끼어들며) 할머니랑 외할머니랑은 조금 친하면서도 조금 안 친해요."


"왜 그렇게 생각했어?"


"우리 할머니랑 외할머니랑 시장에서 만났단 말이에요. 우리 할머니가 외할머니 손을 막 잡고 엄청 잘해줬단 말이에요. 근데 그거 뻥이에요."


"뻥?"


"네. 외할머니가 우리 할머니 흉 보는 거 다 아니깐요. 근데 만나면 친한 척하니까 뻥이죠."




언제부턴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육아법은 <교육적>이라는 이름과 대척점으로 밀려나는 것 같다. 젊은 부모 모임에 가 보면 조부모가 키운 아이가 말이 늦고 버릇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글이 가끔 올라온다. 그러면 득달같이 위로나 처방의 댓글이 달리는데 주로 노인세대의 고지식한 교육법에 대한 성토 일색이다. 젊은 부모들은 자신의 육아방식을 '신식', 조부모의 방식을 '구식'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고기를 자기 입에 넣어 질겅질겅 씹다가 아이 입에 넣어주는 걸 질겁하며 '비위생적'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조부모의 과한 간섭 때문에 양육에 방해를 받는다는 고충도 종종 본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게 젊은 엄마 아빠 편을 들게 된다. 자식을 다 키운 조부모 입장에서는 이제 갓 부모가 된 이들이 미숙해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양육에 간섭을 하면 아이는 혼란스럽다. 부모가 미숙하다고 조부모가 개입하면 아이는 부모를 우스운 존재로 여긴다. 엄마의 훈육이 안 통하는 것이다. 조부모의 입김이 세면 엄마가 아이의 존경을 받기 어렵다. 아이와 엄마 모두 불행해지는 것이다. 조부모는 어디까지나 칭찬하고 어르는 역할이 맞다. 


옳든 그르든 아이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 가치관을 만들고 평생을 살아간다. 부모와 조부모의 서로 다른 가치관이 아이 앞에서 충돌하면 건강한 가치관을 만들기 어렵다. 부족하더라도 자식은 부모가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해가며 키우는게 맞다. 자식을 끝까지 책임 질 사람은 생이 얼마 안 남은 조부모가 아니라 엄마 아빠이기 때문이다. 조부모 또한 자신도 한 때에는 미숙한 '부모'였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이의 부모 또한 홧김에 내뱉는 말이 아이들의 조부모에 대한 가치관을 바꿀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