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자들은 미리 계획해서 여러 날을 묶어서 휴가를 다녀왔지만 그녀 같은 신규직원은 선임자들이 신청하고 남은 날들을 때워야 해서 하루씩 듬성듬성 휴가가 주어진대. 그나마 불쌍하다고 배려를 받아서 월요일이야. 오전 근무인 토요일과 휴일인 일요일까지 해야 이틀 반짜리 휴가인 거야. 그녀는 나와 여행을 가고 싶어 했어. 그런데 휴가 날이 하필이면 우리 학교 개학날이었어. 아무리 개학날이라고 해도 그녀와의 여행과 바꿀 수는 없잖아. 엄마한테는 친구네 집에서 공부하고 자고 온다고 말한 뒤 토요일 아침에 가방을 챙겼어. 된장, 맛소금, 고춧가루, 쌀 한 봉지와 목욕탕에서 주워 온 주머니칼을 챙겨 은행 앞에서 기다렸다가 그녀가 퇴근하자마자 터미널로 갔어. 표 끊고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지하상가에서 커플 티와 청바지도 샀어.
우리가 버스를 타고 간 곳은 언젠가 그녀가 가족여행으로 갔다던 전라북도 무주였어. 도착해 보니 어둑했어. 급히 터미널 주변에서 장을 본 다음 구천동 들어가는 버스를 탔어. 내리자 마자 동네 할머니들이 숙소 호객을 했어. 근처를 한 바퀴 돌았지만 빈 방을 구할 수 없어서 결국 호객 할머니를 따라 계곡 옆 산채 식당에서 운영하는 방을 얻었어. 버스에서 멀미를 한 그녀가 방에서 한숨 자는 동안 식당 아주머니의 허락을 받아 주방에서 밥을 하고 장 봐온 재료로 찌개를 끓였어. 아주머니가 김치와 오이소박이를 주셨어. 그렇게 상을 차려 방으로 돌아 그녀를 깨워 밥을 먹고 계곡에 내려가 설거지를 한 뒤 주변을 걸었어. 며칠 전 태풍으로 패인 흔적이 여전한데도 달이 떠 그런지 고즈넉했어. 방으로 돌아와 비누와 수건을 꺼내 계곡에 내려가 세수를 하고 발을 씻었어. 이런 자잘한 일들이 소꿉장난처럼 재미있었어. 낯선 곳에 그녀와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걱정도 됐어.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내일 아침엔 뭘 해 먹지? 아침 먹은 다음엔 또 뭘로 그녀를 즐겁게 해 주나. 그녀가 가방에서 초를 꺼내 불을 붙였어. 분홍색이었어. 전에 내가 함박스테이크 사 줬던 친구들이 여행 가서 분위기 내라고 사 줬대. 우리가 여행 왔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들킨 것처럼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 우린 촛불을 켜 놓고 마주 보고 앉았어. 사방은 이미 깜깜했어. 일렁이는 촛불 너머로 그녀 얼굴이 발갛게 보였어.
“인희씨랑 이틀만 같이 살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딱 오늘이네.”
“좋아?”
“응. 너무 좋아요.”
둘이 서로를 응시하면서 오 분쯤 있었나? 문 닫은 방안에 촛불까지 켜고 있자니 더운 거야. 그렇다고 문을 열고 발을 치자니 옆방 사람들이 수시로 화장실 다니면서 다 보거든. 할 수 없이 선풍기를 켰어. 그 바람에 촛불이 훅 꺼지는 거야. 다시 초에 불을 붙이고 선풍기 방향을 다른 쪽으로 틀어보았어. 꺼지진 않지만 너무 출렁거렸어. 그녀가 피식 웃었어. 아오, 이게 뭐니? 어떻게 좀 해 봐. 난 선풍기 바람을 최대한 안 오게 촛불을 이리저리 막아봤어. 그러는 동안 땀이 더 흥건해졌어. 그녀가 촛불을 훅 불어 끄더니 내 손을 잡아끌었어. 나 술 먹고 싶어. 숙소 밖으로 나오니 시원했어. 구멍가게에서 소주와 과자를 사서 계곡으로 내려갔어. 그곳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거나 떠들며 놀고 있었어. 시원한 밤바람에 그녀 기분이 한층 좋아진 것 같았어. 그녀가 잔에 술을 붓고 호기롭게 건배를 외치자마자 단숨에 마시더니 머리에 붓는 시늉을 했어. 은행에서 회식할 때 배웠대. 모든 말과 몸짓이 귀엽고 달콤했어. 그 계곡에서 우린 끝없이 깔깔댔어. 모기가 무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휴가 기분을 제대로 내고 싶었는지 술을 계속 마셨어. 그럴수록 숙소에 돌아갈 일이 걱정돼 난 술을 마실 수가 없었어.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비틀거리는 그녀를 겨우 붙잡아 돌다리를 짚어가며 계곡에서 나오니 이번엔 숙소까지 업어 달래. 원하던 바였어. 달빛 아래에 그녀를 업고 주변을 크게 한 바퀴돌아 방 앞 쪽마루까지 왔어. 시간이 좀 늦었는지 옆방에는 코 고는 소리가 들렸어.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녀도 곯아떨어졌어.
바람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새벽이었어. 쌀을 한 그릇 덜어 계곡물에 불려 놓고 들어오니 그녀도 일어나 있었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시시한 머리며 얼굴을 가렸어. 하지만 얼굴이 문제가 아니었어. 모기에 물려 팔이며 종아리까지 울긋불긋 난리야. 같이 물려도 난 흔적이 거의 없는데 그녀는 하얀 피부가 불쌍할 정도였어. 그녀가 어제 술 마신 걸 귀엽게 자책하다가 수건과 비누를 들고 세수하러 갔어. 그 사이에 난 주방에서 아침 준비를 했어. 아침을 먹고 계곡을 따라 걸으며 다른 방을 알아보기로 했어. 어제 잔 방은 허름해서 문틈으로 모기가 들어왔거든. 다행히 그날은 일요일이고 관광객들이 빠져나가 좋은 방이 많았어. 산 쪽으로 창이 나있고 침대까지 있는 방을 어제보다 더 싸게 구할 수 있었어.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 보니 절경이 많았어. 우린 어느 출렁다리에서 흔들거리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초록 이끼가 물씬한 바위 그늘에 앉아 얘기도 했어. 그러다 점심을 먹으러 갔고 다시 계곡에 내려가 양말을 벗고 발을 담갔어. 그녀와 함께 있으니 뭘 하든 좋았어. 마침 빈 평상이 있길래 나란히 누워 하늘을 봤어. 나뭇잎이 바람에 일렁였어.
“저거 도토리나무다. 맞지?”
“땡. 사시나무예요. 이파리가 이리저리 뒤집어지면서 일렁이죠? 사시나무 떨 듯 떤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을 걸.”
“아, 그럼 저건? 뭐야?”
“물봉선. 꽃이 봉선화 닮았는데 물가에 펴요. 우리 아버지 산소 올라가는 길목에 이맘때쯤 많은데.”
“주현씨, 아버지 생각나겠네?”
“네. 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근데... 정말 고등학교 졸업하면 열관리 기사 시험 볼 거야?”
“그럴 수 있다면요. 자격증 따면 목욕탕 보일러 기사로 취직이 잘 되니까. 근데 그게 쉬운지 어려운지 몰라서...”
“그러면 정말 좋지만... 지금은 보일러 기사만이라도 되면 소원이 없을 거 같아요. 인희씨는요? 대학 졸업하면 은행 그만두고 글 쓸 거예요?”
“아빠는 내가 글 쓰는 거 반대하셔. 하더라도 시집 가서 하래. 어차피 애 낳으면 은행 그만둬야 하니까 그때 하란 얘기지. 나도 그러고 싶어. 애 낳고 상황 봐서 드라마 공모전에 나갈 거야.”
“이건 딴 얘긴데요, 만약에... 인희씨가 나 같은 사람이랑 결혼한다면 부모님이 괜찮으실까? 아이고,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
“그러니까 주현씨가 잘해야지. 대학도 가고, 취직도 하고. 자신 없어?”
“자신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님의 기대가 변하실지...”
“그러니까. 잘해야 돼. 무조건. 알았지?”
무조건?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녀가 아직 내 실상을 잘 모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불길한 느낌과 함께. 하긴, 잘 모르는 게 당연해. 그녀는 나처럼 가난해보지 않았으니까. 또 아버지처럼 자수성가 한 사람의 무용담을 믿으며 자라온 그녀로서는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아버지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몰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그녀 아버지처럼 성공할 것 같지 않은데. 당장 대학 갈 형편도 안되잖아.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일한다 해도 일자리 구하는 것부터 꼬인다면 끝이야. 무조건 열심히 하라는 말은, 어쩌면 나를 위한 격려라기보다 그녀 자신을 위한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다고 물어볼 수는 없었어. 그건 그녀나 나 모두에게 지금의 비관적인 실상을 확인시키는 거야. 서로에게 잔인한 일이지.
“왜. 힘들어? 주현씨가 잘 될 자신이 없는 거야, 나랑 결혼할 일이 싫은 거야?”
피식. 웃음이 나왔어. 순수한 것 같기도 하고 물정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한 그녀였어. 하지만 우린 여행을 와 있으니까. 즐거워야 해.
“아하, 인희씨를 위해서는 무조건 내가 잘해야겠네. 알겠어요. 잘할게요. 무조건!”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할 무렵엔 구름이 껴 달을 볼 수 없었어. 난 계곡에 내려가서, 그녀는 방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방에 와서 잠시 앉아 있다가 침대에 누웠어. 혹시 떨어질 수도 있으니 그녀를 벽 쪽에 눕게 했어. 불을 끄니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어. 침대에서 자 본 적이 없는 나는 떨어질까 봐 걱정도 됐지만 어쩔 수 없었어. 침대는 생각보다 넓고 푹신했어.
“인희씨는 어떤 드라마를 쓰고 싶어요?”
“사랑 얘기. 순수한 사랑.”
“멋있겠다. 남녀 주인공은 누구로 하고?”
“남자는 이덕화, 여자는 원미경이지.”
깜깜한 밤에 멋진 남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그녀 입에서 펼쳐졌어. 어린 시절에 한 동네에서 자란 남녀가 서로 좋아했는데 어떤 일로 헤어져. 그 사이에 여자는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돼. 그런데 우연히 남자를 다시 만나는 거야. 만나 보니 남자는 자기를 그리워하며 결혼도 안 했다니 이걸 어째? 이미 주말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이야기여서일까, 아니면 어젯밤 내가 잠을 설쳐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나 봐. 그녀가 내 얼굴을 쥐고 막 흔들었어.
“야, 죽을래? 내 얘기가 졸려?”
“켁... 아니, 난 안 잤는...”
“자는 소리 다 들었어. 너 죽었어!”
그녀가 내 멱살을 잡는 흉내를 냈어. 그대로 있었어. 그녀가 입술을 포개 왔어.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밤새 우린 입을 맞추고 껴안기를 반복했어. 창밖엔 귀뚜라미 소리가 났어. 얘기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가 또 깨면 손을 더듬어 얼굴을 만지고 키스를 했어. 그러다 또 어느새 잠들었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둘 다 입술이 발갛게 부어있었어. 민망한 생각이 들었어. 아침을 해 먹고 가방을 챙겨 버스터미널에 가서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어. 몸이 아파 학교에 못 간다고 거짓말을 했어. 선생님은 오후에라도 나와 공부하라고 하셨어. 오늘 하루 결석때문에 시험을 잘 못 볼 수도 있겠다 싶으니 조급한 마음이 들었어.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잤어. 서울에 도착한 뒤 그녀 집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어.
“주현씨, 나 말고 딴 여자 만나면 죽어. 알았지?”
“그럼요. 내가 인희씨 얼마나 좋아하는데. 근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나랑 잤잖아. 두 밤이나. 잤으면 남자가 책임져야지.”
“엥? 아니, 누가 들으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하겠네. 우린 그냥...”
“암튼! 잤잖아. 내가 자는 동안 니가 뭔 생각했는지 어떻게 아냐?”
“내가? 무슨... 생각?”
“내가 남자들 그러는 거 모를 줄 알어? 우리 아빠한테 확 일러 버릴까 보다.”
“그래요. 일렀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더러 인희씨 책임지라 그러시면 나도 안심이겠네. 인희씨 선 안 봐도 되고...”
그녀는 집으로 들어가고 난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학교 가서 열두 시까지 자습을 했어.
40. 그 포르노 잡지 속 여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다음날, 학교 쉬는 시간이었어. 평소 친하게 지내는 실장 녀석이 내 셔츠 깃을 들추더니 목에 멍이 있다면서 누구한테 맞았냐고 물어. 멍? 교실 뒤편 거울을 보니 목 여기저기에 시퍼런 멍들이 여기저기 있었어. 그걸 보던 다른 아이가 나를 툭 쳤어.
“씹혔냐?”
“씹혀? 뭘?”
“쪼가리. 맞지?”
윽. 이런... 그녀와의 여행 후유증이었어. 그날엔 몰랐는데 하루가 지나니 목 주변 여기저기에 퍼런 멍이 드러나 있었어. 친구들이 몰려들어 내 옷을 마음대로 젖혀가며 구경하느라 법석을 떨었어. 그런 거 아니라고 해도 믿을 생각을 안 해. 여자는 누구냐, 어느 학교 다니냐, 섹시하냐, 얌전한 게 부뚜막 먼저 올라간다더니 요 새끼 발랑 까진 새끼네. 시끌벅적했어. 몇 녀석이 부러운 표정을 하고 물었어.
“야, 뿅 가디? 너도 좀 씹었냐?”
“아, 씹긴 뭘 씹어. 새끼들아”
“으흐흐. 그럼 씹히기만 했쩌요? 보통 여자가 아니네. 존나 까졌나 봐.”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더 이상 응대하지 않자 수그러들었어. 문득 그녀가 걱정됐어. 혹시 그녀에게도 멍이 있으면 큰일인데. 저녁 도시락을 후다닥 먹고 공중전화로 달려갔어. 업무 마치고 한참 정리 중이던 그녀가 아우, 어떡해, 어떡해를 외치면서 깔깔 웃었어.
“난 괜찮아요. 근데... 인희씨도 혹시 그런가 해서...”
“나? 그럴 거 같아요, 안 그럴 것 같아요? 안 가르쳐주지롱. 깔깔.”
“난 시퍼렇게 멍이 들었던데...”
“나? 난 더 하지롱. 너 이제 우리 아빠한테 죽었어. 각오해. 깔깔.”
멍은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진해지더니 그녀를 만나는 주말이 되도록 여전했어.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내 어깨며 목덜미를 이리저리 헤집어 보며 한참 웃었어. 나야말로 그녀의 목을 확인하고 싶은데 머플러를 해서 볼 수가 있나. 그녀는 나를 골려줄 만큼 곯리더니 자기 머플러를 풀어 보였어. 근데 깨끗한 거야.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가 내 볼을 양손으로 꼬집으며 흔들었어.
“야, 멍이 어떻게 생기냐? 니가 뭘 하긴 했냐? 큭큭.”
나도 한다고 한 거 같은데 그 정도로는 자국이 나지 않나? 우리 사이를 난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지만 그녀는 반대였어. 여자들은 원래 그러는지 주변 친구들에게 다 말했다는 거야. 그럼 그들이 나를 막 상상할 거 아냐? 당혹스럽고 민망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어.
“설마 키스... 이런 것까지 다 말하는 건 아니죠?”
“다 말하는데? 그게 뭐 없는 일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똑바로 하세요. 호호.”
“여자들 사이에선 그런 게 어떤 의미예요? 자랑은 아닐 거 같은데...?”
“당연히 자랑이지. 나쁜 짓이야, 그럼? 서로 걱정해주는 거야. 나나 친구들이 각자의 연애를 하지만 다들 초보잖아. 그러니까 서로 얘기하면서 잘하고 있는지 말해주는 거지. 그러니까 니가 잘못하면 내 친구들이 너 죽일지도 몰라. 알았지?”
만약 내가 학교 친구들에게 그녀와 여행 가서 자고 왔다는 말을 한다면 반응이 어떨까. 녀석들은 내가 그녀와 음탕한 짓을 했다고 믿어버릴 거야. 난 알아. 녀석들이 상상하는 나와 그녀는 그들이 몰래 돌려보는 포르노 잡지 속 장면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당시 우리 반에는 도색잡지를 꾸준히 보급하는 친구가 있었어. 서열대로 잡지가 돌다가 나에게도 왔지. 그 장면들이 주는 충격은 어떤 폭탄보다 강했어. 성호르몬이 몸을 가득 채워 건드리면 터질 준비가 되어 있던 왕성한 우리에게 잡지 속 사진들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야한 속성을 모두 지니고 있었어. 큰 성기를 가진 남자 배우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상대를 뚫을 눈빛이고 가슴이 큰 여자는 또 그걸 갈구하는 표정이었어. 끝도 없이 다양하게 구사되는 체위들을 묘사한 사진이나 만화를 한 번 보고 나면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맴돌았어. 문제를 풀다가도 연필 선이 조금이라도 곡선을 이루면 잡지 속 여자의 가슴이며 엉덩이가 떠오르는 거야. 그런 상상을 따라가다 보면 사타구니가 축축해지곤 했어. 하지만 난 한 번도 도색 잡지 속 여자를 인희씨로 떠올려 본 적은 없어. 잡지를 볼 때마다 피가 쏠리는 몽정을 경험을 하면서도 그녀를 상대로 욕정이 해소되는 상상은 하지 않았어. 처음부터 아예. 하면 절대 안 되는 거였어. 나의 인희씨는 내게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일부러 참거나 절제해서가 아니라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야. 내가 그렇게 정했어. 그래야 할 것 같았어. 그런데 그녀는 나만큼은 아닌지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거야.
“근데... 내가 주현씨 목에 그거... 할 때 어땠어? 좋았어? 남자들은 그런 거 좋아하잖아.”
키스할 때의 느낌이 입술에 말랑한 점액질이 닿는 느낌이라면 내 목덜미며 귀 밑 여기저기에 닿은 입술은 또 다른 쾌감이었어. 뭐랄까, 온몸에 퍼져 있는 어떤 물컹한 것이 내 목덜미 주변으로 팽팽하게 쏠리는 긴장감. 그것들이 그녀 입술 속으로 빨려 들어가 폭발하면 헉, 숨이 막히면서 고개가 뒤로 꺾이고 다른 쪽 목덜미도 어서 내어 주고 싶어 지는 느낌. 목덜미뿐 아니라 쇄골, 또 그 아래 더 깊은 곳까지 말야. 아니, 내주는 게 아니라 빼앗기기를 바라는 심정이 맞아. 고통스러운 듯 얼굴은 일그러지지만 쾌감에 굴복하듯 이내 나른해져. 몸의 세포 하나하나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 소멸될 때까지 그녀가 계속 괴롭혀주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들었어.
“좋았어요. 근데 좋았다는 말 한마디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내 목에 입술이 닿았을 땐 입에 하는 키스와는 느낌이 달랐어요. 간질간질하면서 뭉클하기도 하고 곤두서는 느낌? 그러다 훅 하고 빨아들일 땐 뭔가가 내 속에서 잔뜩 충전된 뭔가가 터져 나가는 것 같아요.”
“근데 넌... 왜 안 했어? 나한테 하기 싫었어?”
“겁이 났어요. 인희씨를 해치는 것 같아서. 내가 그러면... 혹시라도 인희씨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 봐...”
“그럼 다음엔 나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내가 말해주면 되잖아.”
“그 날은 왠지 인희씨가 허락하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그렇다고 또 물어볼 일도 아닌 것 같고... 물어보기 전에 내가 알아채야 할 것 같은? 사실 나도 그때 인희씨 마음은 어땠을까, 궁금해요.”
“음... 허락하지 않았을 거야. 그냥, 아직은. 아니, 그렇다고 당장 다음엔 된다는 것도 아니야. 그냥... 언젠가 허락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런 건 미리 정하고 안 정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물어보지 않길 잘했네. 인희씨가 곤란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허락한다는 건 부끄러움과도 닿아있을 것 같고 거절을 주고받는 마음도 불편할 것 같아요. 잘못하면 인희씨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걱정됐어요.”
“응. 물어보지 않고도 알아주면 난 고맙지... 주현씨 마음 알아. 그래서 걱정 없이 여행 간 거야. 내 친구들이 주현씨 마음에 든대. 나 지켜줬다고.”
“흐음... 난 인희씨를 지켜준다... 이런 생각까지는 못했어요. 맞아. 지켜주고 말고 이런 생각 이전에 사실 걱정됐어요. 겁도 나고... 혹시 인희씨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 봐...”
“앞으로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내가 말해줘야겠다. 만약에 말야. 내가 괜찮다고 했음 주현씨도 하고 싶었을까?”
“해 보고 싶어요. 해도 된다면. 아주 잘해보고 싶어. 인희씨도 나처럼 짜릿해지게. 난 엄청 좋았거든요...”
그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웃었어. 거 봐. 이런 인희씨를 그런 잡지 속 여자들 대신 상상하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