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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운 Mar 13. 2022

스스로를 구원하는 영웅

<더 배트맨> 단평 

※ <더 배트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영화화된 '배트맨'이 또 다른 단독 영화로 제작된다고 했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기대감보다는 대중들이 접해와서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배트맨' 캐릭터를 어떻게 새롭게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개봉한 뒤, 스크린으로 직접 접한 <더 배트맨>은 이러한 걱정을 불식시키듯 기존의 배트맨 영화들과는 다른 노선으로 완전히 새로운 '배트맨' 영화를 보여주었다. 



다른 '배트맨' 영화들과의 차별성을 위해 <더 배트맨>이 선택한 방향성은 '성장하는 영웅'이다. 모든 영웅들의 서사 속에는 악당과의 대결을 통해 성장하는 서사가 포함되어 있지만, <더 배트맨>의 성장이 다른 이유는 미성숙한 개인이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오프닝에서 배트맨은 도시의 어둠 속에 숨어 위험에 처한 인물을 구해준다. 그는 분명 타인을 구하지만, 그를 처음으로 마주한 시민은 그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게 살려달라고 말한다. <더 배트맨>에서 브루스 웨인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듯한 다른 영화 속의 브루스 웨인과 달리 감정적이고 미성숙한 인물처럼 보이며, 이는 '배트맨'이란 가면을 쓰고 영웅으로 활동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고담시를 위해 어둠 속에서 범죄와 싸우며 활동하지만, 영웅이란 자각이 없는 상태의 민간인에 가깝다. 



이러한 '배트맨'이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시점은 두 부분으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펭귄의 뒤를 자신의 차로 추격할 때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깨닫게 되는 시점이다. 영화 속에서 항상 바이크로 이동하던 배트맨은 펭귄의 뒤를 추격할 때 비로소 자신의 배트모빌을 타고 이동한다. 배트모빌은 배트맨의 상징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수많은 배트맨 영화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더 배트맨>에서는 배트모빌이 영화 중반이 지났을 때 등장하는데, 첫 등장 시점이 고담시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움직이던 배트맨이 본격적으로 악당과 대치하며 추격전을 벌이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항상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행동하던 배트맨이 자신의 모습을 외부에 적극적으로 드러낸 장면이면서 동시에 본인이 영웅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배트맨이 목숨까지 건 추격을 통해 스스로 영웅으로 각성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 장면이 배트맨이 영웅의 외양을 갖추는 장면이라면, 내면적으로 영웅으로서 각성하는 장면은 팔코네에게 자신의 아버지에 얽힌 비밀을 듣고 알프레드에게 찾아가는 순간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범죄의 무고한 희생자였다는 것을 의심해본 적 없었던 배트맨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얽힌 비밀을 깨닫고 심적으로 엄청나게 흔들린다. 알프레드에게 아버지가 선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아버지를 책망하는 듯 이야기하지만, 알프레드를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가 실수를 했을 뿐 리들러에게 희생당한 이들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이때 그는 아버지가 실수를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일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고 그것을 온전히 감내하기로 한다. 사실 그전까지 배트맨은 자신의 부모를 죽게 만든 '범죄'를 '복수(vengeance)'한다고 이야기하며 고담시의 범죄를 처단하는 행위를 정당화해왔었다. 자신이 부모에게 숨겨져 있던 진실이 드러난 상황에서 배트맨은 자신의 목적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만족이 아닌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영웅으로 비로소 거듭난다.



<더 배트맨>이 구현된 영상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붉은색 조명이 사용되는 방식이다. 붉은색은 주로 위험, 경고를 표시할 때 등장하는 색이다. 하지만 <더 배트맨>에서 붉은색은 오히려 희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엔딩 무렵 홍수 범람을 피해 스타디움으로 모인 사람들을 향해 리들러의 추종자들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때 배트맨이 등장해 리들러의 추종자들을 하나씩 제압하고 그중에서 한 사람의 복면을 제거해 누구냐고 묻는다. 이때 얼굴이 드러난 사람은 시장의 장례식에서 경찰선을 넘어가려고 하자 제지당했던 일반인이다. 그는 배트맨에게 "나는 복수다(I'm vengeance)"라고 말한다. 자신 스스로를 '복수'라고 칭하며 범죄를 처단해왔던 배트맨은 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여태까지 해왔던 모든 것들이 리들러의 추종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뒤 배트맨의 행동은 달라진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붉은색 조명탄을 사용해 사람들을 구하고 조명탄의 빛을 통해 사람들을 이끄는 배트맨의 모습은 그가 빛 속으로 나와 사람들을 구하는 희망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는 밤새 사람들의 곁을 지키며 구조대 헬기로 올라가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배트맨의 뒤로 비치는 붉은 태양과 연결되어 이 모든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고 나서 배트맨이 자경단이 아닌 비로소 진정한 영웅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반 오프닝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기꺼이 드러낸 배트맨은 시민들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자, 깊은 우울감 속에 갇혀있던 스스로를 구한 히어로가 되었다. 리들러 그리고 리들러의 추종자들과 같은 위치에 놓일 뻔했었지만, 자기 자신의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해냈기에 배트맨은 비로소 타인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 


<더 배트맨>은 결론적으로 뻔한 영웅 서사가 아닌, 미성숙한 존재가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기 위해 스스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기존의 배트맨 영화들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을 갖는다.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하는 행동을 모두 선이라고 할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의 어둠을 직면하고 이를 극복해나감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면으로 인해 <더 배트맨>은 배트맨 실사화 시리즈 중 가장 암울하고 음습하지만 동시에 가장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는 영화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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