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평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지난 3월 27일 개봉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 중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익히 들어왔었지만, 딱히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었는데, 이번 신작은 묘하게 개봉 전부터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었다. '성악설'을 기본적으로 믿는 사람이다 보니 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 궁금해졌고, 그렇기에 난생처음으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이야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순한 이야기였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타쿠미와 타쿠미의 어린 딸 하나.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며 살아가던 두 사람에게 새로운 변화가 찾아온다. 그것은 마을의 한 곳에 글램핑장을 설치하려는 대도시의 사람들이 나타난 것. 그들은 글램핑장을 어떻게든 유치시키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마을 사람들의 의문을 납득시키려고 하지만, 그들은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고 심지어 마을 사람들 중 일부는 그들에게 굉장히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코로나 지원금을 받기 위해 글램핑장을 강행시키려는 사장의 명령에 따라 직원들은 마을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며 바쁘게 살아가는 타쿠미에게 접근하고 그와 함께 마을 일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하루를 보내던 중 타쿠미의 딸 하나가 없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이야기가 상당히 심플하게 느껴졌던 이유는 이 이야기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해관계와 욕망이 다양하게 얽혀 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가 아닌,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야기로 이 영화의 이야기를 이해했을 때, 비로소 왜 이런 제목이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 속에서 타쿠미는 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형상화된 자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일본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사이에서는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존댓말을 쓴다. 서로에게 극도의 존댓말을 쓰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과 달리 타쿠미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존댓말을 쓰지 않고 반말을 쓴다. 이는 그가 인간 사회의 이해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타쿠미는 자연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무가 어떤 종류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산에서 나는 식물이 어떤 식물인지를 모두 파악하고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타쿠미는 캠핑장을 유치하려고 설명회를 연 직원들인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에게 어떠한 감정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설명회에서 계속해서 항의를 하고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마을 주민들도 있었지만 타쿠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함을 유지하며 글램핑장의 계획이 엉망인 이유들을 조목조목 짚어줄 뿐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타쿠미는 존댓말이나 존칭을 절대로 쓰지 않는다.) 설명회가 끝난 후 마을 회장이 타쿠미와 친하게 지내라는 말에 직원들이 다가갔을 때도 질색하는 다른 마을 사람과 달리 타쿠미는 그들에게 딱히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그들과 순순히 연락처를 주고받고, 이후에 그들이 차를 타고 다시 내려왔을 때에도 무덤덤하게 대한다. 이는 인간들을 대하는 자연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사실상 어떠한 감정도 갖고 있지 않는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을 대하는 타쿠미의 태도처럼 자연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혹은 인간들이 자신에게 어떤 나쁜 의도를 갖고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딱히 크게 제재를 가하거나 위해를 가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관망하고 지켜볼 뿐이다. 도시에서 마을사람들을 설득하러 온 타카하시가 오히려 조용한 마을로 이주해 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할 때도 타쿠미는 크게 감흥이 없다. 그가 장작을 패려고 시도할 때에도 그저 묵묵히 조언을 해주거나 우동 가게에 물이 필요할 때 도시 사람들을 데려다가 물을 뜨게 할 때에도 별 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타쿠미의 딸 하나가 사라지고 하나의 실종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그때 비로소 타쿠미, 즉 자연이 갖는 감정이 드러나게 된다.
딸 하나가 사라진 뒤 영화 속에서는 하나의 실종에 대한 불길한 징조가 하나씩 드러난다. 마유즈미가 손을 다쳐 타쿠미의 집에서 머물고 있을 때 주전자의 소리가 울린다던지, 숲 속에서 죽어있던 사슴의 뼈라던지, 가시나무에 맺혀있던 핏방울이라던지 등. 하나는 영화 속에서 계속 언급되었던 총을 맞은 사슴을 보고 치료해 주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사슴의 뿔에 치여 죽음을 맞이한다. 죽어있던 하나를 발견한 타카하시가 하나를 향해 다가가는 순간, 타쿠미는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감정을 내비친다. 그것은 어떤 분노나 악의와 같은 감정이 아닌, 조용히 발견자를 처단하는 행동에 가깝다. 사실 처음 봤을 때 계속해서 잔잔하게 전개되던 영화 속에서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살인'은 꽤나 충격적이다. 영화는 타쿠미가 도시에서 온 직원들과 함께 하나를 찾으려고 탄 차에서 나눈 대화에서 이를 이미 암시한다. 도시 사람들이 세우려고 하는 글램핑장이 사슴이 지나다니는 길이라고 말하는 타쿠미에게 직원들은 사슴이 지나다니지 못하도록 높은 울타리를 세우자고 말한다. 이전 장면에서 직원들은 일을 진행시키는 실질적인 인물들이 아닌 코로나 지원금을 타기 위해 사장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인물들이라는 것이 비친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 도시 사람들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법칙에 따라 아직 개발되지 않은 자연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꾸려고 하는 도시 사람들. 이때 어떠한 일에도 감흥이 없어 보였던 타쿠미도 이들과 의견을 좁힐 수 없는 괴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타쿠미는 딸의 죽음을 목격한 도시 사람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사슴들은 그곳에서 살 수 있는 터전을 잃을 것이고 사슴으로 인해 발생한 인명피해는 결국 글램핑장을 설치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타쿠미에게 있어 딸의 죽음은 마치 자연의 순리와도 같다. 총에 맞은 사슴은 분명 상처를 입었지만, 그것은 인간이 관여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사슴이 총에 맞은 것은 인간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었지만, 거기에 또다시 인간이 관여를 하려 했기에 사슴의 야생성이 이를 저지시켰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딸의 죽음이 이뤄졌고, 숲 속에서 계속 남아있던 사슴의 뼈처럼 딸의 죽음도 자연의 순리대로 이뤄질 터였다. 죽고 사라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기에 타쿠미는 딸의 죽음을 목격한 타카하시를 죽인다. 자연의 세계 속에서 죽고 사라지는 것은 어떠한 악의에 따른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바로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순리를 비추는 카메라 앵글은 전적으로 인간의 시점보다는 자연의 시점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분명 자신만의 법칙과 순리를 따라 돌아가고 있는 자연의 세계. 영화의 첫 오프닝에서 사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무줄기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자연의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엔딩에서도 숨을 컥컥 대면서 일어났다가 비틀대며 쓰러지는 타카하시를 집중해서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를 그저 거대한 설원의 일부처럼 자연의 풍경으로 담으면서 끝을 낸다. 영화 속 사슴의 죽어있는 뼈처럼 하나와 타카하시도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작들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나에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서정적이고 평온한 화면 속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묵직한 메시지가 떠오르면서 그동안 경험했던 영화 관람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전작들에서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이번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관람을 통해 앞으로 나올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은 내가 꼭 챙겨봐야 할 필수 관람 작품들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