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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븐니 Sep 15. 2021

1-2. 이성(理性)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원피스에 가리어진 책 1-2화 l 감정적인 사람 말고 감성적인 사람

2. 이성(理性)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복습)https://brunch.co.kr/@songvely1004/313#comment

청중에 이름 없는 새야,

왜 그리도 구슬프게 우느냐


어차피 들꽃이 진 자리는

찾을 수없지 않느냐


- 무이이야, 하현우 <육룡이 나르샤 OST>-


감정적인 사람 말고 감성적인 사람


원피스로 책을 가리고 싶었다. 온갖 책을 덮어두고 책의 이성 다움을 제외한 나의 감성적인 부분을 돌보고 싶었다. 슬럼프를 겪었던 당시의 나의 심정은 네모지게 생긴 그 묵직한 책들에 염증이 났고, 싫어진 책들만큼 이성적인 조언, 잔소리, 충고들이 전부 와닿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감성적인 책, 분야도 찾으라면 찾을 수 있겠지만 이미 그 묵직한 책 덩어리들이 주는 중압감이 싫었다.) 사람이 어떻게 AI처럼 매 순간, 감정적인 부분을 무시하고 이성적인 모습으로만 살아갈 수 있지? 에 대한 마음속 목소리가 끓어올랐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우린 로봇이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산속에 올라가서 ‘감정도 중요해!’라는 메아리를 울리고 그 소리를 동네방네 울리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누가 나에게 ‘이성’적으로만 살라고 정언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추구해온 활동들은 비교적 이성적 논리성을 추구하고, 책과 관련된 철학에 대한 탐구를 추구해온 활동들과 맞닿아 있었다. 수치를 측정하는 정량적인 경쟁 방식에 삶은 던져졌고, 성실도를 체크할 수 있는 정성적인 경쟁 사회에서 나는 정도의 중요성을 모르고 날뛰는 한 마리의 야생마였다. 그래서 그 이성적임, 철학, 책들을 사랑한 사람이, 잡고 싶었던 목표들을 코앞에서 놓쳐버리고 모든 것에서 버려지게 된 ‘이름 없는 한 마리의 새’의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라렸다. 눈을 뜨는 순간들이 괴로웠다. 아마, 모든 책을 불태우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자세하게 열거함에 따라서, 누군가의 위로나 동정 따위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잘 모르는 누군가의 위로나 동정을 받을 만큼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아님을 밝히는 바이다. 이 따위의 슬럼프 따위는 기록으로 남겨도 되지 않을 만큼 위선적인 포장의 기술과 적당히 건강한 ‘악함’이 있고, 노력과 성실에 대한 자부심이 남아 있기에 섣부른 위로나 동정을 받는 것을 꺼린다. 하지만, 내가 상처의 아픔과 인생의 쓰라림을 굳이 논하려는 이유는, 나 같은 인생의 쓰라린 맛을 본 사람들에게 치유의 기회, 회복의 단서가 되길 바라는 응원의 차원에서 글을 쓰고 있다. 그 사람들도 나같이 글과 책, 어떤 사람의 시답지 않은 응원의 메시지 따위는 보기 싫을 정도의 아픔과 슬픔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글이 읽힌다면, 나는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하락곡선이 깊어진 만큼, 성숙 곡선이 반작용으로 상승할 수도 있다고’  

‘ 이름 없는 새에서, 자존감이 꽉 찬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새가 될 수도 있다고’




이성과 감성, 우리들의 삶을 논하려면 ‘프로이트’를 공부하자


프로이트*(정신분석학의 창시자)는 Id, Ego, Super Ego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정신분석학적 연구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학자이다. 그의 개념은 니비도라는 인간의 잠재적 의식, 현재의 에고, 도덕적 선을 추구하는 슈퍼에고라는 것. 이와 같은 분류는 심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개념이다. 그러한 그의 개념을 빌려 우리 사회를 설명하자면, 우리는 본성과 도덕선이라는 두 개의 지점에서의 현재의 ‘이성적 에고’를 지니며 사회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사회의 ‘도덕선’은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꼭짓점일지도 모른다.


나도 사회의 도덕선, 규범,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의 실수는 내 ID 근저에 어떤 감정이 쌓여가는지도 모른 채, 슈퍼에고의 이성적임, 도덕선에 대한 추구만을 강요하여 살아왔다는 것이다. 빙산의 일각으로 표현하자면 보이는 산에만 집중했다. 그 아래 있는 빙산의 뿌리에 대한 규모와 모양새, 크기와 성분에 대하여서는 정작 조사하지 않은 삶이었다. 그렇게 ID, Ego, Super Ego의 균형이 무너져 있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 “형씨, 잠깐만 인생 멈춰보시오!”하는 하늘의 다그침이 무섭도록 외로웠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가는 바였다.


내가 감정을 중요시하면서도, 이성의 끈과 힘을 계속적으로 같이 말하는 것은 냉정한 프로의 세계, 사회생활에서는 감정과 감성보다는 이성의 힘이 더 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선택함에 있어서 이성적 객관성 없이 감정적으로, 감성적인 면만을 보인다면 그 사람의 평판은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은 기분파야, 틈만 나면 자기의 느낌과 감정대로 행동해’라는 오인을 받게 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이성을 뒤따르는 감성은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 자신이 오인을 받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성적 영역의 성벽을 잘 쌓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감정적인 사람보다 감성적인 사람이 되자고 주장하는 이유다.


세상은 그렇다네


가족은 이해하지 우리의 슬픔

친척은 위로하지 우리의 아픔

사회는 그렇지 않다네

프로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네


친구는 이해하지 우리의 약함

지인은 공감하지 우리의 입장

사회는 그렇지 않다네

프로의 세계는 합리적 이라네


-Velypoem.2021-




싸이코가 되지 않으려면 감성을 잘 다루자 l 사회적 가면을 쓴다는 것


그렇게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센치해지는 날들이 있었고, 내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슬럼프 기간에는 내가 사람들이 말하는 겉모습만 멀쩡해 보이는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어. 나의 감정과 인생곡선은 매우 밑바닥에 처해있는데, 사회적인 연결망에서만 나를 그럴듯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에 대한 생각들 말이야. 이상과 현실의 괴리, 보여지는 것과 마음속에서의 내 모습의 괴리에서 오는 모든 문제들에서 나 정말 ‘Psyco’ 같은 Persona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 대한 생각들이 들기도 하였어.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그렇게 현실 사회에서 추구하는 도덕선에 대한 괴리가 느껴질 때는 일기나 에세이, 시와 문학을 써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어. 이는 꼭 규격과 형식에 맞춰서 잘쓰라는 것은 아니야. 다만 너를 힘들게 하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감정을 너의 방식으로 표현해보라는 거야.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영성을 기를 수 있는 특권아닐까? 너의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스트레스와 슬럼프의 감정, 우울과 상처 아픔의 시간을 기록으로 남겨 멋진 일기를 써보는 것. 그것이 정말 인간이 가진 본연의 슬럼프 회복의 방식은 아닐까? 오늘도 활자를 애증했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추천해보고자해.


한편 위에서 언급한 싸이코가 누구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자면,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자의적이지 않게 싸이코가 되는 걸지도 몰라. (사실 저런 사이코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우리 자신들일지도..) 겉으로는 멀쩡한 척하면서 뒤에서는 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고, 세상에 대한 반항심을 갖고 멋진 무도회의 ‘가짜 가면’을 쓰고 있는 우리들. 우리가 그렇게 앞뒤 다른 감정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코인 노래방에 가서 홀로 노래라도 불러보는 건 어떨까? 세상의 유행가로 우리의 상처를 씻고, 사람에 대한 미움을 해소하고, 세상에 대한 반항을 하는 시간. 무대 위의 가수라는 주인공이 되어 우리만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시간을 마주해서 마이너스의 감정을 잘 다스려보자.


그리고, 너무 정적인 라이프 스타일만 지속된다면 우리의 인생의 무게가, 액체 아래 가라앉은 알갱이처럼 침잠되어 버리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어. 앉아서 이성적인 생각만 하고, 머리로만 고민한다면 별다른 해결책도 얻지 못할뿐더러, 반복되는 뇌의 회로 활동에 머리만 지끈지끈 두통이 일어날 거야. ‘동적인 취미생활’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간단하게 실천할 수 있어. 일어나서 가벼운 산책을 해도 좋고,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보는 것도 좋아. 골프나 테니스, 볼링 같은 스포츠를 하면서 고민을 잊어보는 것도 좋고. 뭔가 가만히 앉아서 나의 고민을 이성적 끈으로 잡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상쾌한 기분이 들 거야. ^^


-블리의 슬럼프 극복법 처방전 (제안: 글쓰기, 코인 노래방, 동적인 취미생활)-


[참고]: 이드-가장 원시적인 충동 l 자아-2차적과정의 결과로 자아(에고) l 초자아-죄책감을 들게함


1920년대에 발간된 2권의 책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 Jenseits des Lustprinzips〉(1920)·〈자아와 이드 Das Ich und das Es〉(1923)에서 그는 초기에 정신을 무의식·전의식(preconscious)·의식으로 구분하던 것과 이후 자신이 이드(id)·자아(ego)·초자아(superego)로 범주화한 것 사이의 관계를 밝히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이드는 유아기 때의 만족을 추구하는 가장 원시적인 충동으로서 흥분의 방출과 에너지의 집중을 통해 쾌락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충동이며, 본능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1차적 과정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2차적 과정의 결과로 자아가 성장하는데, 이는 현실원리를 따르며 이드에 의해 지배되는 쾌락원리와 구별된다.


여기서 자기보존을 위해 욕망의 만족을 유보해야 할 필요를 점차 배우게 되면서 충족되지 못한 욕망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는데, 자아는 이러한 갈등을 처리하기 위해 방어 메커니즘을 발달시킨다. 방어 메커니즘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억제이지만 그외에도 반동형성·분리·취소·부정·전이·합리화 등이 이에 속한다.


3번째 구성요소는 초자아로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해소되는 동안에 부모의 명령을 동일화함으로써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것으로부터 발달된다. 초자아는 부분적으로만 의식적이며 이드로부터 자아로 향하는 특정한 공격적인 요소를 빌려와서 죄책감을 들게 한다. (다음백과-프로이트 C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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