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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븐니 Sep 28. 2021

1-6.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할 때는, 중지

■원피스로 가리어진 책 1-6화 l 인생에도 엠바고가 있습니다.

1-6 아무일도 하지 말아야 할때는, 중지 l 인생에도 엠바고가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취해야 할 태도 l 상황에 대한 전달보다는 스스로의 내공 구축


우리가 만약 임진왜란으로 되돌아가서 조선시대의 수군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거북선은 불타고 13척의 배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이러한 상황적인 절망은 일본에게 밝히며 '우리는 열악한 상황에 있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의기소침해 있고, 승산이 없는 상황입니다!'라고 굳이 소식을 전해야 할까?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차라리 소식을 전하기 보다는 우리 내부의 흐트러진 용기와 군기, 두려움을 바로 잡고 남아서 운용할 수 있는 13척의 배라도 잘 정비하고 장군님의 말씀을 잘 따르면서 본인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내는 것이 상황을 타개하며,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아닐까?


내가 슬럼프 시간에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인간관계'를 예전처럼 똑같이 많이 만나면서 나의 힘든 시간을 보낼까? 아니면, 조금 그 횟수를 줄여가면서 나의 슬럼프를 넘길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예전만큼 자랑거리도 자신감도, 소통에 대한 애정도 많이 줄어가는 시점에서 사람에 대한 입맛이 많이 줄어들었다. '잠수'를 타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처럼의 빈도와 소통의 적극적인 자세에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나의 울적한 상황에서 그동안 들어보지 않았던 나의 내면의 마음과 목소리를 듣는 시간이 되기를 원했다. '내공'을 키우고 싶었다. 타인과의 소통에서 찾는 '소통'보다는 나만의 시간에 그동안 내 안에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내 마음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내면'을 돌아보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하며 만남의 횟수를 줄였다.


그러면 가족 중 한 명은, 나에게 "그래도 예전처럼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기운을 되찾는게 어떠니?"라는 말을 자주 말하곤 했다. 그 가족의 성격은 원래 '전화를 통한 소통', '수다를 통한 스트레스 해소', '만남을 통한 즉각적인 해결'등을 선호하는 의사소통방식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더욱 자신의 신념을 투영시키면서 나에게 사람들을 그래도 많이 만나면서 그 과정을 함께 하라는 조언을 많이 하였다. 그말도 일리는 있었다. 자신만의 동굴과 터널에 갇혀 정작 어느 부분이 문제인지 찾지도 못한 채 어둠속에서 웅크리는 시간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장사가 다 망한 느낌의 자존감과 연속된 실패에 따른 심리적 변화가 감지된 상황에서 조언처럼의 행동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생에도 엠바고가 필요합니다 l 시시콜콜 모든 걸 다 떠벌려서 위로받긴 싫은걸~?


무언가에 힘이 들때 타인의 위로를 통해서 위안이 되고 자존감, 자존심을 회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직접적인 소통과 조언을 통해서도 심리적 상처를 회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주로 사람들에게 위로를 해준 사람의 입장에 오랜 기간 있었으므로, 이건 진짜 자만하고 교만한 자세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나에게는 자연스럽지가 않은 일'이었다. 누군가가 '힘을 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더 자존심에 상처를 내는 그런 나 자신에게 대단히 쓸데없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기에 위로를 받는게 더 슬프고 힘든 상황에 나를 몰아넣는 절차였다.


생각해보아라. 맨날 그렇게 타인에게는 자칭 '동기부여가, 열정파이터'가 되어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비맞은 생쥐꼴이 되어서 누군가의 위로의 말을 듣고 있는 모습을. 정말 나를 위하고 내가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받는 공감과 위로의 말은 물론 힘이 난다. 하지만 비교적 내가 위로를 전해온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다시 위로를 받자니 왠지 자존심이 상하고 심리적인 감정이 더욱 힘들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렇게 심리적으로 많이 가라앉았다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빈틈을 보여주라는 식의 조언이 좋은의도 였겠지만 와닿지가 않았다. 정말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 사람들을 만날 것을 권유하는 그 가족의 '조언'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신문에서는 어떤 사실에 대한 소식을 정해진 날에 전하는 '엠바고'라는 개념이 있다. 보도시기를 정했는데 미리 말하는 것은 보도의 관행에는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엠바고가 필요한 건 '슬럼프'의 시기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슬럼프과 상처를 가진 본인이 스스로를 치유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점차 자신의 본연의 모습과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때에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나의 소식을 보도하는 것. 누가 소중한 우리의 슬럼프와 상처에 함부로 소식을 전하고 손을 댄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본다. 본인에게는 스스로 회복하고 자생력을 갖추어야 할 회복의 기간과 공간이 필요할텐데 그걸 굳이 소식을 전달해면서 까지 알릴 필요가 있겠는가? 자신의 상처는 왠만하면 알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이들에게는 말하고 위안을 얻고 힘을 얻으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것을 뒤에서 구경거리로 말하고, 당신의 상처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굳이 논할 필요가 없어보인다. 그러니 자신의 상처를 그렇게 쉽게 아무에게나 함부로 드러내지 말고 전달하는 멋없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 정말 나를 위해주고 아껴주는 이들에게도, 나의 자존감과 내공을 지켜가면서 말하자. 그 어느 누구도 나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 누군가의 위로와 조언만을 바란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자생력을 길러보는 것도 필요한 과정일 수 있겠다. 하지만, 정말 타인의 도움이 연고가 되고 뼈와 살이 되는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엠바고를 깨고 나아가보자. 그렇게 우리의 삶의 슬럼프의 주기에 강약을 조절하며 승리해보자.


어떤 위로


닥쳐오는 풍랑의 파도에

갈길을 잃어버린

한 선원에게

들려온 미세한 음성


"얘야, 거기서 울지말고

어서 일어나 헤엄치렴"


정신없이 밀려온 파도에

정신을 잃어버린

한 선원에게

들려온 또다른 음성


"얘야, 거기서 울지말고

도착할 성에서 웃음지으렴."


-Velypoem,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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