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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Oct 18. 2021

엄마 몰래 목욕탕 갔던 아이

어른의 걱정에 대하여

걱정을 달고 사는 이들이 있다. 과거의 나도 그랬다. 특히 일어날지 아닐지도 모를 일을 두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면 그 끝은 오만 가지 걱정과 불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좋은 쪽으로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현재는 뒷전이 되기 마련이었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은 진짜일까? 나는 언제부터 걱정 쟁이가 되었던 걸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찬찬히 되짚어보니 어릴 적엔 분명 그러지 않았다. 팔자라면 평생을 통해 영향을 미쳐야 할 텐데 어린이였던 나는 걱정은커녕 밤늦도록 친구들과 놀기 바빴고, 청소년기엔 남학생들에게 관심을 쏟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때는 짝사랑하는 아이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을 하면 했지, 왜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지 불안하지도, 비극적인 결말을 상상하지도 않았다. 이루어진 사랑은 거의 제로였는데도 말이다.  




초등학교 때 피아노 학원을 몇 년 다녔다. 피아노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지만 학원 대기실에 산처럼 쌓여 있던 보물섬, 소년중앙 같은 월간 만화책은 나의 발길을 늘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4학년이었던 어느 날 친구가 나를 보고 피아노 학원을 빠지고 목욕탕에 가자고 꼬드겼다. 우리 가족은 집에 있는 화장실 욕조에서만 목욕을 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단 한 번도 공중목욕탕을 가본 일이 없었다. 그곳에 같이 가자는 친구의 꾐은 훗날 고등학교 때 호프집 가서 레몬소주를 마셔보자던 또 다른 친구의 제안만큼이나 짜릿한 유혹이었다. 그런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된다. 만화책은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엄마에게는 학원에 간다고 하고 피아노 가방을 흔들며 집을 나섰다. 우리는 같은 아파트 6층과 1층에 살았다.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몇 분 동안 설레는 마음이 로켓처럼 위로 솟구쳤다. "랄라랄라" 하는 콧노래도 저절로 나왔다. 친구네 들러 피아노 교재를 빼놓았다. 빈자리에 수건, 샴푸, 빗, 로션 등을 담은 뒤 급하게 목욕탕으로 향했다. 


주어진 시간은 약 한 시간 반. 내가 피아노 수업을 받고 만화책을 읽고 집에 귀가하는 시간 안에 목욕을 마치고 돌아오는 게 그날의 미션이었다. 요금을 내야 하는 건물 입구에서 친구는 진짜 어른처럼 턱 하니 돈을 내놓았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 두 눈에 감탄과 존경을 담아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날 어떤 풍경이 펼쳐졌더라?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때를 밀었는지, 얼마나 온탕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지, 머리를 뒤로 젖히고 감았는지 앞으로 엎드려 감았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다녀온 후 “드디어 나도 목욕탕에 가봤다”는 뿌듯함이 넘실댔던 것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이리저리 흔들며 친구와 시장 거리를 활보했다. 떡볶이도 사 먹었다. 엄마에게 걸려서 혼날 것 같은 두려움, 걱정? NO. 전혀 없었다. 생애 첫 목욕탕 행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당장 눈앞의 즐거움이 가장 중요했다. 어떻게 하면 그걸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는지만 마음에 담고 살았다. 간혹 엄마 모르게 무언가를 하다가 들켜서 혼이 나기도 했지만 그건 그때뿐이었다. 그러다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니 점점 걱정을 안고 사는 사람이 되어갔다. 


특히 결혼을 하여 아이가 태어나고 남편 따라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바꾸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삶은 불안으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손끝 하나라도 다치면 어쩌지? 유학생 남편이 졸업 후 직장은 잘 잡을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온갖 물음표들이 두둥실 떠다니며 나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걱정 속의 문장들이었다.      


이제 우리는 해야 할 일을 제쳐 두고 목욕탕을 가는 모험은 즐기지 못할 나이가 되었다. 회사에 가기 싫다고 직장 대신 공원에 갈 수는 없다. 육아가 힘들다고 아이를 내팽개치고 친구를 만나 맥주 한 잔 할 수도 없다. 그런 행동을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알기 때문이고 나와 가족의 삶을 직접 이끌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걱정도 팔자라는 말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타고난 팔자가 그런 게 아니라 남들보다 좀 더 예민하게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싶은데 뭔가 막혀서 고민하는 것일 뿐이다. 다만 지나치면 언제나 문제가 되는 법이므로 적당한 균형을 찾는 게 핵심이다. (내가 어떻게 균형을 찾게 되었는 지는 뒤에 나올 글에 담을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일상에 넘쳐흐르는 걱정과 불안을 마주하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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