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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Oct 20. 2021

평화주의자의 최후는
평화롭지 않았다

어른의 평화에 대하여

노희경 작가가 쓴 <그들이 사는 세상>은 내 인생 드라마 중 하나이다. 방송국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현빈과 송혜교가 주인공인 정지오와 주준영을 연기했다. 대여섯 번은 본 것 같다. 희한하게도 이 드라마는 볼 때마다 나의 속을 여러 차례 헤집어 놓는다. 영상으로 봤건만 마지막 편을 보고 나면 책을 한 권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내 사랑에 대해, 아킬레스건과 한계에 대해, 글과 인생에 대해 곱씹고 돌아보느라 여운이 짙게 남는다.  

    

기억에 남는 여러 장면 중 하나가 있다. 학교 선후배 사이였던 지오와 준영은 대학교 때 잠깐 사귄 적이 있었지만 금세 헤어진 연인 사이다. 그러다가 둘이 같은 방송국에 들어와 드라마 PD가 되고 다시 만나 연애를 한다. 그때 준영이 말한다.      

 

선배, 우리 다시 만나서는
서로 상처 주는 말 같은 거 하지 말자.
그리고 쉽게 헤어지지 말자.
전처럼 싸우지도 말고.     


지오가 웃으며 대답한다.       


“싸우자. 연희(지오의 옛 연인)랑은
못 그랬거든.
서로 말을 너무 안 했어.
싸울 일이란 게 늘 너무 작은 일이잖아.
쪼잔하고 쪽팔리고 괜히 존심 부리고.
근데 그래서 말 안 함,
나중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지는 것 같애.      


그 후 지오와 준영은 참 많이도 소리 지르고 싸운다. 성인이 된 후 고래고래 목소리 높여 누군가와 싸워 본 일이 없는 나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싸움 자체를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그런 일이 생길 때면 눈물부터 터져 훌쩍거리다가 얼른 해결점을 찾아 끝내고는 했다. 세상 어떤 사람과도 불편한 관계가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했다. 이 세상이 다정한 언어와 친절한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길 바랐다.      


그런데 나는 성격이 급하다. 평화와 조급함이 만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나?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찬성의 표를 던진다. 누구와 싸우고 나면 얼른 화해하고 싶다. 상황이 어떻든 먼저 사과하고 상황을 마무리 짓는 게 마음이 편하다. 한편으로는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싸울 기회를, 진심 어린 속내를 드러낼 기회를 피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욕먹지 않으려고. 모든 이에게 사랑받고 싶었으니까.     


마흔이 넘고 보니 평화를 사랑한다며 했던 나의 행동이 투쟁과 혼란의 순간을 외면한 결과를 낳은 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과정을 거쳐야 성숙한 평화가 찾아오는 법인데. 꼭 준영과 지오처럼은 아니더라도 싸울 땐 싸워야 한다. 방법을 모르는 현명한 사람들은 배운다. 시중에 널린 설득 잘하는 법, 말 잘하는 법,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는 법 같은 책들이 사실은 세련되게 싸우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TV에 나와 독설을 퍼붓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이고 가끔 부러운 걸 보면 그동안 내뿜지 못했던 나의 마음들이 잘 발효되어 숙성된 대신, 어디선가 생으로 살아 아우성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약간은 상한 채로. 


역사적으로 봤을 때 평화 전에 격렬한 투쟁이 있던 적이 많다. 대한민국의 군부독재 종식과 직선제 개헌 쟁취 전에는 87년 6월 항쟁이 있었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이 없었다면 무능력한 왕과 귀족들의 모순을 뿌리 뽑는 일은 한참 뒤에야 일어났을 것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뤄낸 혁명이라서 이름이 붙여진 영국의 ‘명예혁명’이 진짜 명예로운 혁명이었을까? 21세기에도 영국에 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색하기만 하다.   

       

이제는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남에게 상처줄 정도의 독설은 아니더라도 내 맘 속은 전쟁인데 남들의 평화를 위한 평화주의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지오와 준영처럼 핏대 세우며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더라도 할 말은 하며 살아야겠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나에게 싸움을 걸어올 때 피하지 않을 것이다. (조만간 갱년기가 싸움을 걸 것 같다.) 


양 주먹 굳게 쥐고 머리는 약간 숙인 채 눈에 힘 팍! 다 뎀벼! 



* 현명하게 싸우는 것이 내면의 평화를 얻는 지름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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