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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Mar 02. 2022

이토록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복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 팀장에게 일주일 동안 아무 일도 시키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허락을 받고 나서 내가 한 일은 우리 팀에서 보관하는 파일 자료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문서, 사진 등 10년 넘게 쌓인 방대한 자료를 분류하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검색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날짜와 주제를 써넣었다. 팀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저장해 온 것을 통일시켰다. 앞으로 문서를 보관할 때는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매뉴얼도 만들었다.     

 

정리하고 분류하는 걸 좋아한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지금 내 컴퓨터 안 파일들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언젠가는 일목요연하게 만들고 싶다는 게 나의 버킷리스트다. 그러다가 과학 전문기자인 룰루 밀러가 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하여. 나는 삶을 통제하고 싶었던 거다. 편리와 효율이라는 껍데기를 덮고서. 그리고 여기 나보다 훨씬 더 센 강도로 자연의 세계를 통제하고 싶어 하던 생물학자가 있다. 

     


생물학자를 쫒으며 길을 찾고 싶어 했던 저널리스트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광대한 시간과 우주 앞에 ”우리는 소중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자란 룰루 밀러는 어느 날 연인과 이별하고 삶의 방향을 잃는다. 그때 운명처럼 19세기의 한 생물학자를 만났다.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학장을 지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다. 그가 새롭게 찾아내고 이름 붙인 물고기만 2,500종이 넘을 정도였다니 업적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룰루는 오랜 시간 그의 뒤를 쫓으며 길을 찾고 싶어 한다. 집착이라 할 정도로 끈질기게 자연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 했던 데이비드의 모습에 해답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다. 그가 쓴 논문과 에세이, 관련된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저자 역시 집착이라 할 정도로 끈질기게 따라가며 책 안에 그의 행적을 풀어놓는다.      


하지만 그녀가 맞닥뜨린 진실은 일부러 꾸며 놓은 영화 속 반전만큼이나 충격적이다. 그가 우생학 - 좋은 유전자, 나쁜 유전자가 따로 있다는 설의 대표주자였고, 미국에 번지게 한 장본이었던 것이다. 게으르고 가난한 사람들은 날 때부터 그랬다는 것, 그리하여 더 이상 그런 유전자가 퍼지지 못하도록 불임수술을 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킨 것. 이것이 그가 발전시킨 사상과 실천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국민을 개, 돼지로 표현했던 한 정치인이 떠오른다. 인간을 부품처럼 취급하는, 그래서 개죽음을 당해도 위로는커녕 숨기기 급급한 기업의 모습이 떠오른다. 너와 나는 다르니 너쯤은 그런 꼴을 당해도 된다고 하는 이 사회의 모습이 데이비드가 지지했던 우생학과 겹쳐 보이는 건 지나친 해석일까. 미국 여러 주에서 아직도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사람들에게 불임화 수술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물속에 산다고 모두 물고기일 거라는 착각     

 

룰루 역시 이 지점에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인정했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음을.” 하지만 그 옛날 우생학 수용소에 있던 생존자 애나와 메리를 취재하며 우리는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어릴 적 아버지의 가르침에 이제야 반기를 들고 외친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그리고 후속 취재와 연구 덕에 자연 세계에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온 (진리라 믿었던) 세계가 얼마나 좁은 허구인지를 알게 된다. 물에 사는 생명체를 그저 ‘물고기-어류’라고 퉁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비늘 아래 각각의 어류가 가진 생명의 특성을 살펴보면 도무지 하나의 이름을 붙여서는 설명이 안 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분기학자인 캐럴 계숙 윤이 쓴 <자연에 이름 붙이기>라는 책에 뿌리를 둔다. 


물고기가 사실은 물고기가 아니라는 점, 이것은 데이비드 조던의 연구와 성과의 의미를 믈거품으로 만든 셈이다.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그가 억울해하지는 않겠지만 남은 자들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저자가 그에게 복수를 한 것처럼 느껴져 통쾌했다. 게다가 우생학 지지자로서의 그의 행적을 낱낱이 밝혀내지 않았나. 이 책이 발간된 후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 덕분에 스탠퍼드대학과 인디애나대학에 있던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은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녀는 결국 자신만의 방법으로 삶의 방향을 찾는다. 그것이 처음 의도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만족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길 찾기로 시작한 이 장대한 여정 끝에 세상을 바꾸어낸 그녀의 끈질김에 독자로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과학 서적이자 에세이, 세계의 질서를 바라보는 심오한 철학적 문제까지 담고 있는 조금 독특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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