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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Jul 06. 2017

스코틀랜드 마을 축제
<갈라 데이> 참가기

80년 전통의 축제, 온 마을이 들썩들썩

6월 마지막 날 초중고 학생들은 학년의 마지막 수업을 했다. 이튿날부터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여름은 7월이라 해도 최고 온도가 15-20도인지라 시원하다 못해 추울 때도 있다. 그리하여 '한 여름 작열하는 태양의 힘' 같은 걸 느끼기 위해 사람들은 가방을 챙겨 그리스나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로 떠나곤 한다. 하지만 7월 첫날 우리 동네에도 시끌 벅쩍 열정적인 이벤트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윈치버러 갈라 데이>! 마을에서 축제가 열렸다.     


"엄마, 갈라 데이에 참가하려면 이 신청서 써 오래요." 

"무슨 데이? 아, 마을 축제?"


3개월 전쯤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가져왔다. <갈라 데이>는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열리는 하루짜리 마을 축제를 뜻하는 말이다. 작년 이맘때 이 곳으로 이사 오기 전 집집마다 화려한 장식을 해 놓은 게 기억이 났다. 2016년 축제가 끝난 직 후 아직 데코레이션을 정리하지 않은 몇몇 집들을 본 것이었다. 1년이 지나 이제 우리 딸들이 참가 신청서를 손에 쥐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일한 동양인인 우리도 이 동네 주민이구나 싶은. 

   

여러 행사 중 초등학생만 참가할 수 있는 어린이 퍼레이드가 있는데 거기에 함께하려면 미리 신청을 해야 했다. 이 마을에 정착하여 맞이하는 첫 번째 마을 축제인데 우리 딸들이 빠질 수야 있나? 한 번 해 보자!라고 의기투합한 후 신청서를 냈다. 큰 딸은 바우어 걸(bower gir)을 작은 딸은 하얀 요정(white fairy)을 배정받았다. 뭘 어떻게 하는 건지 몰랐지만 '하다 보면 알겠지!' 정신으로 두 딸은 마을 축제에 퐁당~ 발을 담갔다.    


축제 전반을 담당했던 라이언네 엄마 글렌다와 테일러네 엄마 수잔은 몇 달 전부터 눈코 뜰새 없어 보였다. 기금 마련을 위해 다방면으로 홍보를 했고, 6월이 되자 매주 금요일마다 아이들과 함께 퍼레이드 연습을 했다. 갈라 데이가 열리기 1주일 전부터는 매일 저녁 커뮤니티 센터, 교회 등에서 달리기 시합이나 각종 게임, 윈치버러 갓 탤런트 등 다양한 이벤트가 이어졌다. 그리고 지난주 토요일 그날이 왔다.  



하늘색이 유난히 예뻤던 토요일 오후 윈치버러 커뮤니티 센터 옆에 있는 광장으로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생각보다 많은 주민들이 와서 놀랐다. 자그마한 시골 동네에는 여기서 태어나 한 평생을 보낸 사람이 많다. 한 일가가 동네에 모여 살기도 한다. 서로를 잘 알고 있는 터라 축제를 즐기러 나온 주민들이 인사를 나누고 웃고 떠드는 통에 광장 전체가 들썩였다.


앞집에 사는 메리 엄마 샤론(아래 사진 왼쪽)이나 아침 등굣길에 만나는 할머니 아이작도 행사 준비위원이었는데, 화사한 드레스에 화장을 예쁘게 하고 나왔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가장 첫 행사는 윈치버러 여왕 대관식 및 시상식이었다.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아이들은 입장 후 초록색 선 안 쪽 관객석에 앉았다. 특별 초대 주민 외에 일반 주민들은 초록선 바깥에 서서 구경을 했다.  


윈치버러 여왕 대관식에 입장하는 무지개 요정들


윈치버러 여왕 대관식에 입장하는 하얀 요정들 - 어머! 우리  둘째 딸도 보이네! 


매년 초등학교 7학년 여학생 중 한 명이 여왕으로 뽑힌다. 여왕이라고 해서 1년 간 마을을 위해 특별한 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고(^^) 축제 당일 대관식에 참여하며, 내년에 있을 갈라 데이 대관식에 참여하여 왕관을 건네주면 된다. 



첫째 딸(오른쪽 사진 하얀 드레스)이 맡은 바우어 걸이 뭔가 했더니 꽃으로 꾸민 아치를 잡고 있는 역할이었다. 한 시간 가량 진행되었던 대관식 내내 네 명의 바우어 걸은 아치형 꽃장식을 들고 있어야 했다. 거리 시위에 나갈 때도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이 가장 힘든 법인데.......! 우리 딸 수고했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2016년 여왕(왼쪽 사진)도 다음 여왕에게 왕관과 봉을 건네주기 위해 대관식에 참가했다. 새로운 여왕(가운데 사진)이 호위를 받으며 입장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카메라,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담았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가 지면서 왕과 여왕, 왕비가 사라진 지 오래라 다소 생소했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런 대관식 행사가 익숙할 것 같다.



일주일 동안 진행되었던 마을 행사에서 1등을 한 주민들을 위한 시상이 끝나자 본격적인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커뮤니티 센터에서 시작해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가 마을 중심가를 도는 경로였다. 어린이 퍼레이드단뿐 아니라 여러 주민들도 참가해 함께 돌았다. 행렬의 앞뒤에서 경찰들이 호위를 했다. 


앨리스와 미친 모자장수 분장을 한 주민 - 앨리스는 우리집 첫째 딸의 친구인 리아


축제에 음악이 빠질 순 없지


퍼레이드를 준비 중인 하얀 요정 두 명 - 우리집 둘째 딸 그리고 같은 반 친구 에이미 


큰 언니 오빠들은 북도 치고 장구도 치... 아니 북만 치고...! 


80년대 복장을 하고 퍼레이드를 하는 주민들


올해가 윈치버러 갈라 데이 80회째라고 했다. 그래서 몇몇 주민들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80년대 복장을 하고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무슨 날이라고 코스튬 입는 거 유치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특별한 의상을 차려입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이들의 소박한 문화가 부러웠다. 이 마을에 계속 살다 보면 나도 저리 차려입고 행진하고 있으려나? 


퍼레이드 중인 플라워 걸과 바우어걸 - 조오기 끝부분에 우리 딸은 내 눈에만 보일 듯


퍼레이드에 참가한 사람들은 사탕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구경하는 주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퍼레이드를 준비 중인 백파이프 연주단


스코틀랜드 행사에는 종류를 막론하고 항상 백파이프 연주가 함께 한다. 남자가 입는 치마인 킬트를 차려입고 여러 개의 파이프가 담긴 악기를 둘러맨 뒤 때론 혼자 때론 단체로. 이번 갈라 데이에서는 근처 동네 실버 연주단이 와서 행진을 하며 연주를 했다. 백파이프 소리를 듣다 보면 어디선가 하일랜드의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언제 들어도 좋은 소리다. 스코틀랜드를 스코틀랜드답게 만드는 소리다.  


마을 중심가를 돌고 있는 백파이프 연주단


퍼레이드를 구경중인 동네 주민들


광장에서 여왕 대관식에 참가하지 않은 주민들도 행렬이 마을에 들어서자 모두 나와 손을 흔들고 환호했다. 몇몇은 스코틀랜드 깃발을 흔들기도 했다. 2016년과 마찬가지로 마을 곳곳에는 앞뜰을 꾸며 놓은 집들이 많았다. 작년엔 몰랐는데 메시지를 보니 어린이 퍼레이드에 참가하는 집에서 자기 아이 참가 기념으로 집을 꾸며 놓은 것이었다. 우리 집도 딸들이 두 명이나 참가했으니 꾸몄으면 좋았겠지만...! 나는 그걸 몰랐다. 알았어도 엄두가 안 날 일이긴 했다. 아래 사진을 보시라. 


2017년 무지개 요정을 에스코트하는 한소년의 집 앞 - 갈라 데이 집꾸미기 부분에서 1등을 한 집 


2017년 바우어 걸을 하는 엠마네 집 앞


2017년 여왕이 된 라일리네 집


"갈라 데이 재밌게 즐기고 있어요?"


행렬을 따라 걷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나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론"이라고 했다. 내 대답에 할머니는 기뻐했다. 그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여기서 살았다고 했다. 어렸을 때 퍼레이드에 참가한 적이 있냐는 나의 질문에 "물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할머니, 할아버지 대부터 아들, 딸을 거쳐 손자들까지 즐기는 마을 축제가 있다는 건 축복이 아닐까. 여러 세대가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를 통해 가족 간, 이웃 간 공동체는 끈끈해질 것이다. 마을을 잘 유지하는 버팀목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내 부모와 그럴만한 게 있을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떠오르질 않는다. 이제 물리적 거리마저 멀어진 탓에 부모님뿐 아니라 동생이나 옛 친구, 옛 직장동료들을 지금 당장 만난다면 얼마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한국 살 때 서울에서만 살았던 나에게 우리 동네, 우리 마을이라는 소속감이 있기나 했을까? 너무 빽빽하게 몰려 사는 서울, 자고 나면 상전벽해되는 오늘의 서울에서는 더욱 힘든 일일 듯 싶다. 


이제 우리 가족은 스코틀랜드 윈치버러 주민이다. 사람 일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최소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이 동네에서 살 계획이다. 앞으로 몇 번의 갈라 데이를 더 보게 될까? 그것 또한 모를 일이다. 확실한 건 마을 축제를 보며 구경꾼처럼 그들의 문화를 부러워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란 거다. 함께 하면 된다. 같이 즐기면 된다. 여기서 한 1년 살아 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축제는 끝이 났고 본격적인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우연히 검색을 하다가 유튜브에서 우리 동네 갈라 데이의 옛날 영상을 찾았다. 1951년과 1954년 것이었다. 이번에 한 것처럼 여왕 대관식도 하고 마을 퍼레이드도 했다. 지금보다 행사가 더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던 것 같다. 영상의 일부를 정지화면으로 담았으니 잠시 60년 전 스코틀랜드 시골 마을 축제로 여행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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