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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Mar 11. 2022

"있는 힘껏 상상하라"
에든버러 로열 마일에 서서

당신의 상상력을 깨우는 도시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 도착한 첫날을 기억한다. 설렘 반, 걱정 반으로 이 도시에 섰다. 내 양손은 2살, 7살 두 딸의 손을 붙잡고 있었고, 하늘은 짙은 회색 구름을 붙잡고 있었다. 눈앞으로 펼쳐지는 유럽식 건물의 향연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꿈을 꾸어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어 두 눈만 끔뻑거렸다. 하필 스코틀랜드 독립 찬반투표 바로 전날이라 시내의 공기가 비장하게 느껴졌다. 그날이었던 것 같다. 이 도시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날이. 사랑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낯선 곳 우리 가족의 앞날을 위해 나는 꼭 잘 살아내야 했으므로 무작정 이곳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결심 또한 비장했으리라. 


하지만 7년 반이 흐른 지금 이제야 깨닫는다. 그때 그렇게 애쓰지 않았더라도 나는 결국,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매력 철철 넘치는 이 도시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가 한둘이 아닐 텐데 나라고 별 수 있었을까 싶다. 조그마한 것에도 큰 몸짓으로 감동하고 울고 웃는 사람이 바로 나니까. 고운 정만 든 게 아니라 미운 정까지 흠뻑 들고 말았으니 에든버러와 나 사이에는 제법 질긴 연줄이 생겨난 것 같다. 

  



에든버러에서 2년을 살다가 외곽 시골 마을로 이사한 지 6년째가 되었다. 이제 에든버러에 가려면 전차나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도시답게 주차료가 비싸서 차를 직접 몰고 갈 엄두는 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훨씬 좋다. 앞만 보고 운전에 집중하는 대신 양쪽으로 펼쳐지는 스코틀랜드의 투박한 경치를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거주자에서 여행자로 변신할 틈이 생긴다. 일상의 조각들, 크고 작은 걱정의 뭉치들을 잠시 옆으로 밀어 놓을 수 있는 시간이다. 



버스를 타면 한 시간 남짓 동안 창밖 풍경이 들판에서 집들로, 쇼핑센터에서 스포츠 경기장으로 바뀐다. 그러다가 도시의 중심가인 프린세스 스트리트(Princess Street)에 들어설 즈음 내 마음은 거짓말처럼 설레기 시작한다. 이 도시에서는 어쩐지 생각지도 못한, 그것도 꽤 신나는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창문에 바짝 휴대폰을 대고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높은 곳 단단한 바위 언덕에 자리한 에든버러 성의 위용 덕분에 입이 살짝 벌어지는 것은 덤이다. 그리고 몇십 초 후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   


함께 탔던 이들은 이 작은 동양 여자가 에든버러에 처음 왔나 보다, 할 것이다. 그들이 마음껏 짐작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다. 에든버러를 흠뻑 즐기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들에게는 도시 속 하나의 배경이 될 것이다. 상상의 일부일 것이다. 상상력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도시 곳곳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귓가에 대고 다정하게 속삭일 만발의 준비를 하고 있다.  




“꼭 중세 시대로 들어온 것 같아!” 


에든버러를 중세 도시 같다고 말하는 건 그 시대에 만들어진 건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중세와 근세 시대의 건축물들이다. 프린세스 스트리트를 사이에 두고 올드타운과 뉴타운이 자리 잡고 있는데, 두 곳 모두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중 뉴타운은 1800년대에 세워졌다. 200년 이상 된 건물이 즐비한 그곳에 과연 ‘뉴’라는 이름을 계속 붙여도 될까? 소박한 궁금증이 생긴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다. 


뉴타운보다는 1100년대에 세워진 올드타운이 더 매력적이기는 하다. 그중에서도 '로열 마을'은  베스트 오브 베스트다. 이름 그대로 로열층인 왕족이 다니던 길이었다. 가장 윗 편에 서 있는 에든버러 성을 필두로 하여 언덕 아래로 길이 이어지는데, 맨 끝에는 홀리루드 궁전과 스코틀랜드 의회가 나타난다. 그 사이에는 엉겅퀴를 닮은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종교개혁을 이끈 존 녹스의 집, 상인 글래드스톤의 집 등 역사적인 건물로 가득하다.



약 1마일(1.8km)이 되는 이 거리를 그저 걷기만 한다면 2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볼거리가 풍성하기 때문에 최소 하루 정도는 잡아 놓아야 한다. 만약 로열 마일을 중심으로 생선 가시처럼 뻗은 도시의 속내을 살피려면 일주일 가지고도 모자랄 것 같다. 계절 따라 다르고 그곳을 채우는 사람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십 번을 가봤지만 갈 때마다 새롭다.


어느 지점이 되었던 로열 마일 한 복판에 서면 진짜 영화 세트장 속에 선 기분이 된다. 황톳빛, 잿빛의 외벽에 까맣게 그을린 검은 자국까지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을 배경 삼아 그대로 카메라만 돌리면 영화 한 편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21세기에 살면서도 몇 세기를 건너 살아보지 못했던 시대를 바라보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흥분의 감정이 물결처럼 일어난다.  


로열 마일의 바닥


로열 마일의 바닥은 아스팔트가 아니다. 반듯하지 않은 직사각형의 돌들이 줄을 맞춰 놓여 있다. 옛 시절 마차가 다니라고 만들었던 길을 오늘날까지 쓰는 것이라 했다. 이런 길 위에서는 잠시 눈을 감아야 한다. ‘빵빵’ 거리는 자동차 소리의 볼륨을 줄이고 ‘더그덕 더그덕’ 느린 속도로 여느 귀족을 태운 마차가 커다란 바퀴를 굴리며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 옆에서는 맨발의 어린아이들이 뛰논다. 저런! 말 한 마리가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바지자락에 튀기고 말았다. 


괜찮다. 도시의 바람이 금세 말려줄 것이다. 






에든버러에 갈 때마다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계절마다 페스티벌이 열리고 다채로운 행사가 많은 곳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어쩌면 여러 관광객의 등에 매달린 커다란 배낭이나 손에 붙들린 슈트케이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17년 전 세계 여행을 떠났던 젊은 시절의 내가 떠오르는 까닭이리라. 20대였던 그때 여행을 다녀온 직후에는 금세라도 다시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다. 시간은 흘렀고 이제는 여행보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에든버러라는 세상을 향해 탐험을 떠나는 이들이 내뿜는 호흡은 공중에서 부딪혀 긍정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그 기운은 다시 가루가 되어 도시 전체로 내려앉으니. 덕분에 나 역시 그 공기를 나눠 마실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세계 여행 대부분의 시간을 중남미에서 보냈던 남편과 나는 "유럽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다시 오자"고 약속을 했다. 비록 돈을 벌기 전에 와버렸지만 그래도 에든버러만큼은 마음껏 여행하며 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언제 봐도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영화 속 세트장 같은 이곳에서 아직도 방랑을 떠날 기회가 많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나에게 에든버러는 몰래 숨겨두었다가 정말 먹고 싶을 때 하나씩 아껴서 까먹는 롤리팝 같은 곳이다. 하늘 높은 곳으로 웃음 열 트럭과 눈물 다섯 트럭 정도를 올려 보낸 곳에서 생활인과 여행객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기록을 시작한다. 여러 분의 잠든 상상력을 깨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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