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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Oct 28. 2017

캔디, 안소니, 스코틀랜드

젊은 날 여러 사랑을 했다. 추억의 본질이 그러하듯 나의 옛사랑들도 이리저리 각색되어 바람 부는 어느 날 문득 돌이켜보면 풋풋함과 아련함, 쓸쓸함이 적절하게 버무려져 퍽 예쁘게 포장되어 있다. 16년째 한 집에서 살고 있는 남편과의 연예시절을 떠올려도 입 꼬리가 살랑 올라가는데,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야 오죽할까. 사실 사랑이라 이름 붙이기도 민망한 것들이 다반사긴 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새 학년이 되면 이번엔 어떤 남학생을 좋아할 것인지가 큰 관심사였던 나는 이 놈에서 저 놈으로 대상을 자주 바꾸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심하게 상사병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꽤 오래 이어졌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나. 절대로 가 닿을 수 없는 남자였기에 애절함은 눈덩이처럼 커졌고 그럴수록 사랑은 깊어졌다. 상사병의 상대는 만화책 <캔디 캔디>의 남자 주인공인 테리우스 G 그란체스터였다.    

 

정미와 성남이, 지금은 연락도 되지 않는 중학교 때 친구들이다. 1989년 많은 날들을 우리는 정미네 작은 방에 모여 <캔디 캔디> 3권을 낭독하고 녹음하며 보냈다. 조그만 카세트 앞에 올망졸망 입을 모으고 한 명 당 대여섯 명씩 배역을 맡아 연극을 하듯 녹음을 했다.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키고 나면 우리는 테이프를 앞으로 돌려 녹음된 부분을 들었다. 실제와 다른 서로의 목소리와 서툰 연기력이 어찌나 웃기던지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깔깔대곤 했다. 


그 후 귀신에 홀리듯 용돈이 생길 때마다 <캔디 캔디> 만화책 전권(9권)을 사 모았다. 문자 그대로 100번도 넘게 읽으며 주인공들의 대사를 외우는 지경에 다다랐다. 그러면서 테리우스를 향한 사랑을 힘껏 키웠으며 그가 캔디를 떠나보내기 전 백허그를 하는 8권에서는 어김없이 꺼이꺼이 통곡을 했다. 거친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더할 나위 없이 약하고 부드러운 테리우스, 곡선으로 컬이 진 머리, 핸섬보이, 아 나의 옛사랑이여.     


자신을 대신하여 다친 스잔나 때문에 사랑하는 캔디를 보내야 했던 테리우스


캔디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내가 고아여야 하는데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배우가 되어야겠다고. 연극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최소 작품을 통해서만은 캔디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돈 많이 버는 유명한 스타가 되겠다는 철부지 바람이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삶이 아닌 제삼자(특히 캔디)의 인생을 살아보는 것, 그것이 배우가 되고 싶었던 이유였다. 그럴싸하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한꺼번에 여러 개를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은 한 치도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물론 배우가 되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테리우스를 대체할 만한 현실의 남자들이 많았으니까.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남자들을 만나 사랑을 했고 그중 마지막 인연과 결혼을 했다. 그러면서 10년의 사회생활을 끝내고 5년의 미국 유학생 와이프 기간을 거쳐 스코틀랜드에 왔다. 영국을 구성하고 있는 네 나라 중 한 곳이다. 남자가 체크무늬 치마를 입는 나라, 백파이프의 나라. 어라?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풍경 같은데?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시내에 나가면 전통복장 킬트를 입고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남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25년 전에 만났던 <캔디 캔디>의 남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안소니, 아치, 스테아, 앨버트. 내 비록 테리우스에게 가장  큰 마음을 주었지만 캔디의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그들도 학창 시절엔 늘 품고 살았건만. 아이를 둘이나 낳고 나라에서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잠시 잊고 있었던 그들을  한꺼번에 떠올릴 날이 오다니, 반갑다. 녀석들. 여전히 설레지만 이젠 다 아들 같은  놈들이 되었다.  



그땐 무심코 넘겼지만 이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안소니를 비롯한 네 남자가 속한 아드레이 가문의 조상은 스코틀랜드였다는 거다. 만화의 당시 배경이 1900년도 초반이다. 역사적으로 1800년대에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대거 이주했다고 하는데 어쩌면 아드레이가도 그때 옮겨 갔을지 모른다. 킬트나 할로윈 같은 그들의 문화를 간직한 채.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특별 행사가 있을 때마다 종종 킬트를 입고 짜잔 하고 나타났던 이유 말이다. 


안소니가 여우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고, 스테아마저 1차 대전 참전으로 죽고 난 뒤, 아치가 홀로 킬트를 입고 백파이프를 부는 장면이 있다. 충분히 슬픔으로 가득 찬 장면이었지만 백파이프 소리를 알고 난 지금은 그때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악기 특유의 끊어지지 않는 애달픈 소리에 거친 스코틀랜드의 자연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 아치의 비통한 마음이 더해져 연주 소리는 하늘로 올라가다가 방울방울 눈물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진짜 배우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 어떤 직업보다 더 적성에 맞는 일이기도 했을 것 같다. 다행히 나는 나를 잘 아니까 주인공 말고 신스틸러 소리 듣는 개성파 배우가 되지 않았을까. 크크. 가보지 않은 길, 얼마든 상상은 자유니 비웃지 마시길. 하지만 배우가 되었던들 캔디가 되진 못했을 것 같다. 캔디가 되었어도 테리우스를 만나지 않았을지도. 만났어도 바라던 그가 아니었을 수도. 테리우스는 만화책 속에서만 존재하니까.


나는 나름 앨버트 같은 남자와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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