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알아내다
한국 가전제품은 말이 많다. 다른 나라 제품도 말이 많은지 어쩐지 모르겠는데 걔네들은 자기네 나라말로 할 테니 내 입장에서는 한국 제품이 가장 수다쟁이로 느껴진다. 먼저 가장 유명한 쿠쿠 밥솥. 모두들 아시다시피 걔는 밥을 다 하고 나면 꼭 이런다.
"쿠쿠가 맛있는 백미밥을 완성했습니다. 잘 저어주세요."
내가 물을 잘 못 맞췄 수도 있고 쌀이 오래되어 맛이 확 갔을 수도 있지만 언제나 자기가 맛있는 밥을 지었다고 말한다. 먹어 보기도 전에 무슨 자신감? 맛이 있고 없고는 내가 정한다 자식아, 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쿠쿠가 뭐라 하건 남편은 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밥을 안 젓는다. 애들도 마찬가지다. 가족이 뜨고 간 밥통, 내가 뜨려고 보면 주걱으로 밥을 푼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어린아이가 뱀 허물 벗듯이 옷을 벗어놓고 사라진 것처럼. 쿠쿠는 소귀에 경 읽기를 한 거다.
올여름 한국에 다녀왔는데 엄마네서 최강자를 만났다. 바로 에어컨이다. 얘는 리모컨 액정 화면을 보고 온도를 바꿔서 몇 도로 해놨는지 다 아는데도 반드시 되새김질을 한다. 반복학습의 중요성을 알려주려는 듯 바꿀 때마다 한다.
"희망온도를 20도로 설정합니다."
"희망온도를 21도로 설정합니다."
"희망온도를 25도로 설정합니다."
"희망온도를......."
OFF 버튼을 누르면 또 이렇게 떠든다.
"자동청소 건조를 시작합니다. 청소를 끝까지 완료하면 에어컨을 더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어요. 운전 시간 OO 시간, 사용 전력량 OO 와트 아우어입니다."
한 문장도 아니고 제법 긴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뇌에 스친다.
"감히 네가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
청소하면 유지가 잘 되겠지! 그래서 뭐!!!!! 자기가 얼마나 잘난 기계인지, 자동청소 기능까지 있어 에어컨을 더욱 잘 유지할 수 있다는 강의(?)를 끌 때마다 듣고 있자니 에어컨이 지금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친절하고 저렇게 시끄러운 기계들이라니.
들을 게 많은 세상이다. 안 들으려 해도 그러기가 힘들다. 너도 나도 멱살 잡고 내 얘기 좀 들어보라고 애원하며 원하지도 않는 정보를, 광고를, 홍보물을 안겨준다. 급히 따른 맥주잔의 넘치는 거품처럼 그것들은 늘 흘러넘쳐 우선순위도 뒤죽박죽이고 때론 못 들을 걸 들어서 기분이 상할 때도 있다.
또 나는 어떤가.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라 최대한 잘 보이게 카드 뉴스 만들어 인스타에 올리고 블로그에 주절주절 써 내려간다. 듣는 사람 없어도 그러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글도 여러 사람의 팔목을 억지로 잡아끌고 와 "내 말 좀 들어보소!" 하는 격인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기계가 하는 말? 흥, 어림도 없지.
전쟁 같은 경쟁 속에 허우적 대느라 가족이나 친구의 말도, 직장 상사나 후배의 말도 귓등으로 듣는 이 시대에 가전제품들은 왜 말을 하기 시작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처음에는 말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신기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랑했을 것이다. 우리 밥솥은 말도 한다고. 하지만 지금은 시리나 지니 같은 애들이 등장해 날씨도 알려주고 음악도 켜주는데 겨우 자기 일 다 했다고 보고하는 게 뭐 대수일까?
예전 쓰던 한국 밥솥이 고장이 나 어쩔 수 없이 아마존에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을 샀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동안 왜 얘네들이 그렇게 말을 해댔는지! 새 제품의 포장을 뜯자마자 정신없이 쌀을 씻어 저녁밥을 안치고 기다리는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했다. 아마존 밥솥은 조용했고 일에 몰두한 나는 밥이 다 되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딸이 내려와 밥 언제 먹냐고 물을 때는 이미 밥이 된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한국 가전이 말하는 것에는 한국 문화가 담겨 있던 것이다. 친절한 오지랖 문화.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주인이 듣기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마칠 때마다 보고를 함으로써 정신을 쏙 빼놓고 사는 인간들에게 먹을 때가 왔음을 알리는 오지랖. 그러니까 그동안 쿠쿠가 했던 "맛있는 백미밥을 완성했습니다. 잘 저어주세요."이 말의 속뜻은 이거였던 것이다.
"주인님아, 밥 됐어. 잊어버리지 말고 지금 먹어."
에어컨은 이렇게 호통치고 싶었겠지.
"와, 오늘 6시간 사용했어. 많이 썼네? 전기비 괜찮아? 인플레이션이라며?"
맘먹고 경청하지 않아도 고요 속의 이런 외침은 귓가를 때리기 마련이다. 소음인지 기술인지, 관심인지 집착인지 헷갈리는 가운데 옛날 말하던 한국 밥솥이 그리워졌다. 이제는 누가 나에게 밥이 다 됐다고 흔들어 깨울까!! 돌이켜 보니 밥을 잘 저어달란 말은 나중에 주인이 떡밥 먹을까 봐 걱정되어 한 말이었는데. 그것도 몰라보고 시끄럽다고 구박만 했으니!!
이래저래 바쁜 삶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 말하는 밥솥 몫까지 하면서.
글 쓰기로 우주 정복을 꿈꾸는 브런치 작가들이 모여 팀라이트가 되었습니다. 팀라이트 매거진에는 매월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각양각색 이야기를 작가님들의 다른 시선과 색깔로 담아갑니다. 이번 달 주제는 <경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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