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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Oct 17. 2022

친절은 오지랖을 남기고

오지랖에도 기준이 필요해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머릿속엔 어느 절의 대웅전에 앉아 있는 부처님 상이 떠올랐다. 얼굴 전체에 온화한 미소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등에 작은 배낭을 멘 그가 물었다. 


"캔 유 스피크 잉글리시?"


오, 한국 사람은 아니구나. 3호선 안국역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의 일이다. 서 있는 사람도 많았는데 나를 콕 집어 다가와 묻다니 내가 영어 좀 하게 생긴 게야? 어깨가 으쓱해졌다. 간만에 영어 실력 좀 발휘해야겠는 걸.  


"예스, 어브 코올스. 메이 아이 헬프 유?"


대만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현금밖에 없는데 홍대 가는 버스를 어떻게 타야 하냐고 물었다. 홍대! 내가 거기 한 달 머무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으나 질문의 핵심에서 벗어난 영어는 삼가기로 했다. 남자가 뒤를 돌아 시선을 주는 쪽을 따라가 보니 아내와 아들, 딸로 추정되는 사람들(그들 역시 온화해 보였다)이 뒤에 서 있었다. 가족을 대표하여 한국에서 버스 타기 방법을 알아내야 할 책임이 그의 어깨에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엄....... 두유 해브 어 츄라블 카드? 오, 노노, 트래블 카드?"


나는 '문제 카드'가 있냐고 물었다가 '교통 카드'가 있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프 유 원투 테이크 어 버스........ 아이고, 그냥 한국말로 설명하겠다. 오고 가는 대화 속에 영어 비슷한 것들이 정신없이 날아다녔는데 우린 정말 잘 통했고 손짓, 발짓, 몸짓의 세계 공통어를 쓰며 소통을 부드럽게 이어나갔다는 것만 알아주시길. 


"버스 타려면 저기 편의점에서 교통 카드를 사셔야 해요."

"거기 가면 카드를 판다고요?"


다행히 정류장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편의점이 있었다.  


"네, 카드를 사고 그 안에 충전해야 하는데요, 현금만 돼요. 카드는 3,000원 정도 할 겁니다."

"지하철 티켓처럼 나중에 환불되나요?"

"아, 카드 자체는 안돼요."


순간 남자의 얼굴이 복잡하게 구겨졌다. 

 

"저희 내일 한국 떠나요. 그냥 돈 내면 안 되나요?"

"어쩌죠, 요샌 카드만 받아서요."


광화문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다. 내가 타야 할 번호다. 하지만 나는 친절의 한국인. 안 그래도 복잡하게 꼬여 있는 대중교통을 외국인이 이용하려면 얼마나 힘들까 생각해오던 터라 버스는 다음 걸 타기로 하고 이들을 돕기로 작정했다. 대중교통 몇 번 타자고 교통 카드를 사야 하는 실정이라니. 한국이 관광대국으로 가려면 머~얼었구나, 내 카드로 찍어주고 내릴까? 그건 오버인가? 생각하는 찰나, 가족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들끼리 자기네 나라 말로 의견을 나누는 듯했다. 


"저기... 편의점 가서 카드 사는 거 도와드릴까요?"


남자는 예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댓츠 오케이, 땡큐."


그리고는 방금 도착한 272번 버스를 향해 달리는 것이 아닌가? 열린 앞문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 그는 기사에게 뭔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다시 내려와 가족들을 향해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아내, 아들, 딸로 추정되는 그들은 속력을 내어 달려갔고 버스에 냉큼 타버렸다. 버스는 부르릉 소리를 내며 떠났다. 그렇게 온화 미소 가족 일동은 눈앞에서 이만 총총 사라져 버렸다. 


응?


기사님이 아량을 배풀었나. 교통 카드를 사지 않은 가족이 어떻게 버스를 탔을까. 순식간에 돕던 이들이 사라진 이 상황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데 다시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다. 멋쩍은 기분과 함께 버스에 올라타 카드를 찍으려는 찰나,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평소에는 보려고 하지도 않던) 안내판이 보였다. 


<기본요금 안내> 

일반 (성인)

카드 1,200원 

현금 1,300원 


현금 1,300원! 현금 1,300원! 현금 1,300원! 현금을 내고 버스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버스에는 쥐구멍 같은 건 없는지 살폈다. 낯짝이 후끈후끈. 미안한 맘 출렁출렁. 간첩이 된 기분이 되었다. 어렸을 때 간첩 신고 포스터를 보면 담배값이나 버스요금을 모르는 사람은 의심하라고 했는데 대체 무얼 믿고 교통 카드를 사야 한다고 우겼을까. 5년 만에 한국에 들어온 나를 의심해야 했다. 대한민국이 디지털 강국이라고 너무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가만 따져보면 대중교통은 한 번도 현금을 받지 않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나의 친절은 그렇게 방향을 잃고 허공에서 3바퀴 공중회전을 하다가 헛발을 짚으며 오지랖으로 착지했다. 




오지랖은 별명이 많다. 

예쁘게 부르면 친절, 배려, 관심, 도움. 

밉게 부르면 간섭, 참견, 무례, 충고.


이 많은 이름들이 사실은 한 끝 차이라는 게 문제다. 오지랖이 꼭 나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니까. 지나치면 미운 말이 되지만 적절하면 얼마든지 예쁜 말이 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몰랑몰랑하게 만들어주는 연골(! 나이 드니 연골이 중요해서 이런 표현을) 같은 오지랖을 잘만 부리면 우리 사회도 한결 부드러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이 (나쁜 의미로) 유독 오지랖이 심하다고 느끼는 것은 거기에 '비교'가 붙고 '의식해야 할 시선'이 붙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렇게 사니 당신도 그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냐는 식의 비교와 기준, 거기에서 벗어나면 이상한 놈으로 취급하는 문화에 살면서 한두 마디 보태어지는 다른 사람의 말이 듣기 좋을 리는 없을 테지. 


오지랖이 연골이 되기 위한 나만의 제1원칙이 있다. 어떤 선택 때문에 한 사람의 일생이 바뀔 수도 있는 문제라면 말을 아끼는 것이다. 가령 결혼이나 출산, 직장 문제, 연예 문제 등은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바뀔 수 있다. 선택의 결과에 내가 책임을 질 수도 없으므로 이럴 때는 그저 응원만 한다. 


안국역에서 온화 미소 아저씨를 만난 후 나만의 제2원칙이란 게 생겼는데, 정보 같은 걸 알려주며 친절을 베풀 때는 일단 "나를 먼저 의심해보자"가 그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나? 아닐 수도 있다. 이제 내 기억력도 믿을 게 못되고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오류를 안고 사는지 점점 더 알아가는 중이므로 간첩 대신 스스로를 의심하는 습관을 키워보기로 한다. 모르는 것(내가 모를 수도 있는 것)을 섣불리 알려주는 건 아니 도와준 만 못할 뿐이다. 


그나저나 그들은 어떻게 버스에 바로 탈 생각을 했을까. 내 말이 (혹은 영어가?) 그렇게 못 미더웠나. 어쨌든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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