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천국 서울 하늘
대한민국 건축법 어디쯤 "병의원을 끼지 않고는 건물을 짓지 말라"는 내용이 숨어 있는 게 분명한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서울 곳곳 빌딩마다 의료기관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지 않을까? 숙소가 있던 홍대입구도 마찬가지다. 여기가 놀기에만 좋은 곳인 줄 알았는데 아파도 좋은 곳이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이곳엔,
건물 하나에 치과와,
건물 하나에 내과와,
건물 하나에 안과와,
건물 하나에 이비인후과와 정형외과와 산부인과가
층마다 정답게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이토록 많은 병원이 여기저기 별처럼 빛나고 있다는 게 설레기까지 했다. 한국에 살 때는 이게 그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 확실한 증상 없이는 검사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영국에 살아보니 뼛속 깊이 깨우치게 되었다. 아침에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낮에 진료를 볼 수 있는 한국 의료 시스템 만만세!
그래서 발걸음도 당당하게, 피부과에 간 것이다. 머리 위로 태양이 "요놈 불맛 좀 봐라" 하면서 사정없이 내리꽂던 어느 날에. 전날 밤 샤워를 하다가 발견했는데 오른쪽 팔 뒤꿈치에 붙어 있는 점이 엄청 수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점은 갈색인데 비해 이 점은 검정 초록색, 크기는 지름 2mm쯤 되려나. 초진 수속을 마치고 진료실에 들어갔다.
"선생님....... 이거 암은 아니겠죠?"
젊은 남자 의사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질세라 마스크 위로 나온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바라봤다. 그 표정이 뭐랄까, 무표정한데도 어이없는 내색은 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정? 안 먹겠다고 해서 라면 하나만 끓였더니 젓가락 들고 달려들면 어쩌자는 거냐고 다그칠 때의 표정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는 건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언제부터 생겼나요?"
"글쎄요. 어제 발견했어요."
"괜찮아 보이긴 하지만 100% 장담은 못해요."
쌤, 그러면 저는 앞으로 어쩌면 좋은가요.
"확실하게 하려면 조직검사를 하셔야죠. 대학병원에 가시던가 조직검사 가능한 곳을 알아보세요."
이 정도의 점쯤은 의사가 눈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조직검사를 받으라니 안개에 가려져 있던 글자가 점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진짜 피부암? 어 어, 또 나온다 이 버릇. 상황을 제일 나쁜 데까지 몰고 가서 상상하는 이 놈의 몹쓸 버릇.
이번에 한국 나왔더니 암에 걸린 선후배, 동기들이 너무 많다. 폐암, 위암, 유방암, 신장암 종류도 다양하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예비 암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샤프심 박아놓은 것처럼 생긴 2mm짜리 점을 보고도 자연스럽게 암을 떠올렸던 것 같다. 찾아보니까 흑색종이 가장 흔한 피부암이라던데 내 점도 흑녹색....... 아무튼 여기서는 검사가 안 된다니까 더 생각해 보기로 하고 의사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피부암이 흔하지는 않겠죠?"
2초 후 그가 말했다.
"많겠어요?"
피부과 의사는 '답은 네가 정했고 나는 대답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답정나?)'는 듯한 말투로 약간의 한숨까지 섞어가며 대답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인터넷 너무 많이 찾지 마세요, 제발.
네, 알겠어요. 오버 안 하면 되잖아요. 무안해진 나는 속으로 대답을 하며 꾸벅 인사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보험이 적용되어 5,500원을 결제하고 길거리에 나섰는데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나도 모르게 오른 팔꿈치를 감쌌다. 인터넷에서 그랬다. 강력한 자외선을 오래 쐬면 피부에 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뭘 망설여? 온 김에 싹 다 검사하고 가."
대학 동기인 희정이는 정답을 알려주는 족집게 강사처럼 이 검고 초록의 점을 두고 내가 취해야 할 행동강령을 알려줬다. 괜히 안 하고 갔다가 영국 가서 불안하게 사느니 검사받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확실히 안 다음에 편히 살라는 뜻이었다.
"몇만 원 밖에 안 할 걸?
일리 있는 말이다. 영국에서는 아예 의사가 만나주지도 않을 일이니. 진짜 조직검사까지 하고 갈까? 하는 마음을 먹었을 때 희정이의 친언니인 현정 언니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돼! 다음에 나왔을 때 해! 보험 처리해야지."
현정 언니는 보험설계사다. 언니에게 이번에 내 이름으로 된 건강 보험을 하나 가입했다. 한참 망설였다. 영국 사는 나에게 한국 보험이 필요할까? 하지만 피부과를 필두로 하여 빌딩마다 박혀있는 별 같은 병원에다가 600만 원이 넘는 돈을 갖다 바치고 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실비 보험이 있어야겠어! 그랬더니 건강 보험을 들어야 같이 들 수 있단다.
600만 원을 대체 어디다 썼냐고. 주름을 당기거나 코를 높이거나 아니면 가슴에 보형물을 넣어 예뻐지기라도 했으면 말을 안 한다. 건강검진을 시작으로 치과, 내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정형외과, 유방외과, 일반외과를 두루두루 탐방한 결과다.
특히 산부인과에 건강검진을 갔을 때는 염증이 있다면서 그게 세균성인지 바이러스성인지 확인해야 한다고 23만 원을 가져갔다. 마흔 넘으니 나라에서 무료로 검사해준다고 신나게 팔을 흔들며 갔던 곳에서 긁은 카드 금액이다. 과잉 진료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짧은 선택의 순간에 망설임 없이 하겠노라 말했던 건 희정이 말처럼 검사비가 "불안 감소 비용"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맘 편히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비용. 그나마 (5년 만에 찾은 한국이라 작정하고 들고 와서) 쓸 수 있는 경제적 상황이 되었기에 가능했던 비용.
보험은 가입 후 1년이 지나야 혜택이 100%란다. 현정 언니는 팔에 난 점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가 갑자기 커지지만 않는다면 1년 후에 와서 검사해야 한다고 코치를 해줬다. 어떤 병원이든 가기 전에 자기와 상담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앞으로는 병에 걸리더라도 내가 가입한 보험의 설계에 맞춰 아파야 할 판이다.
한국의 병원 숫자가 이렇게 무수한데도 돈이 없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무수하다. 아프지만 않으면 될 일인데, 운동하며 좋은 음식 먹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도 돈이 드는 아이러니라니. 그래도 나는 대한민국의 의료 시스템을 사랑한다. 나이 들었다고 2년마다 건강검진을 해주는 예방의학 발달한 우리나라가 좋다. 자주 골골대는 나는 노후에 병원 이용할 일이 많아질 테니 흠... 이젠 돈만 많이 벌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