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라미 그리려다 쓰게 된 새 안경
#사건 번호 1
패션의 완성은 안경. 한국에 온 김에 새 안경을 맞췄다. 작고 네모진 것을 대신하여 붉은 빛깔의 동그란 테가 코 끝에 앉았다. 뭔가 어색한 느낌. 너무 변신했나. 나는 그저 패션을 완성하고 싶었을 뿐인데? 선택의 결과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머리칼을 쥐어뜯을까 고민하는 순간, 새 동글이 안경은 이렇게 속삭이며 염장을 질렀다.
"동그란 얼굴, 보다 동글게!"
"당신의 다크서클, 더욱더 돋보이게!"
옛날 안경은 썼을 때 아래쪽 테두리가 눈 밑 다크서클(피곤하지 않아도 늘 달고 사는)이 있는 부분과 엇비슷하게 겹쳤기 때문에 나와 마주 보는 사람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새 안경을 쓰니 렌즈 안으로 그것이 쏙 들어와 버렸다. 이런 걸 액자식 기법이라 불러야 하나. 다크서클을 중심으로 안경 테두리가 액자 테두리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아주 광고를 한다. "나 판다요" 하고.
5년 동안 같은 안경을 썼더니 렌즈에 흠집도 나고 싫증도 난 시점이었다. 그동안 금테, 은테, 뿔테, 무테 등을 거쳐 자줏빛 테에 이르렀으니 이제 다시 사이클을 돌려 금테를 해볼까? 하고 마음을 먹었다. 영국보다는 한국 가게에 한국인의 얼굴에 어울리는 안경이 많을 거라 생각했던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안경점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으니.
"어서 오세요!"
친절함이 흠뻑 배어 있는 주인아저씨의 목소리가 아무도 없는 매장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저, 안경을 하려는데요,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 네, 고객님은 도수가 높으시니까 음.......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것 중에 골라 보시겠어요?"
그는 전문가의 향기를 풍기며 3종류의 테를 탁자 위에 턱 내놓았다. 모양이 모두 동글동글하고 원래 쓰던 것보다 컸다. 직접 써보기도 전에 알았다. 저것들은 모두 나를 명랑 만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을. 내 얼굴은 동그란 편이고 (나이 들면서) 턱 부분이 네모지게 바뀌었기 때문에 그런 안경테들은 써보나 마나 코믹하게 보일 게 뻔했다. 나에겐 작고 납작하면서도 양쪽으로 살짝 올라간 게 잘 어울린다. 안경 인생 35년 동안 갈고닦은 연구 성과다.
"혹시....... 더 작은 건 없을까요?"
"아! 고객님, 요즘 이런 게 유행이라서요. 작은 게 안 나와요. 직접 써보시면 다를 걸요?"
그는 매장을 바라보며 여기 다 둘러봐도 소용없다는 듯 말했다. 진짜 그랬다. 제법 넓은 매장 곳곳을 샅샅이 뒤져봐도 안경테는 대부분 동글동글 부드럽고 크게 돌아가고 있었다. 납작한 모양이어도 옆으로 퍼진 크기가 커서 내 렌즈 도수에는 맞지 않았다.
다른 곳을 가? 말어? 가? 말어? 가? 말어? 치열하게 고민하는 찰나의 순간이 하릴없이 지나는 사이, 주인장은 번갈아 가며 내 얼굴에 안경들을 씌웠고 엉겁결에 금테가 아닌 붉은 테를 골라 결제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거기,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쩐지 진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상황 종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안경을 새로 하자 길거리에 안경 쓴 사람들만 보였다. 마스크 위로 하나 같이 동그스름한 안경들이 얹혀 있었다.
#사건 번호 2
패션의 완성은 머리다. (원래 패션을 완성하는 건 좀 많다!) 한국에 온 김에 헤어 스타일을 새롭게 해 보기로 했다. 미장원에 가서 숱 좀 치고 살짝 자를까 했다. 그러나 헤어 디자이너는 S자로 소용돌이치는 나의 속 머리를 들춰 보더니 볼륨 매직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팔랑팔랑 신나게 귀를 흔들며 홀랑홀랑 그 주장에 넘어갔다. 머리 스타일 바꾸면 기분이 업되지. 해주세요! 두어 시간 후 거울을 봤을 때 알아차렸다. 한국에서는 지금 이런 단발이 유행인가 보구나.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고르게 곡선으로 떨어지는 머리가 아닌 아랫부분에 볼륨이 풍성하게 들어간 스타일. 친구들을 만날 때 자주 보았던 머리다. 그 후 나를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오~ 그거 우영우 머리 아니야?"
"언니, 힙한 머리 하셨군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얼굴은 동그란 편이고 (나이 들면서) 턱 부분이 네모지게 바뀌었기 때문에 그 머리와 나 사이에는 결코 가 닿기 힘든 거리감이 존재했다. 또다시 진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에겐 찰떡 같이 어울렸던 머리.
얼굴이 갸름한 사람이 하면 무지 세련될 머리.
그러나 나에겐 아싸 가오리.
결론적으로 나는 사건 1과 사건 2를 거치며 "판다 가오리"가 되었다. 포유류와 어류의 컬래버레이션이다. 나는 그저 패션을 완성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은 유행에 민감한 것 같다. 특히 패션 부분에서는 뭐 하나가 뜨면 빨리, 넓게도 퍼진다. 해마다 바뀌는 속도는 또 어찌나 빠른지 명탐정 바베크가 나왔던 만화영화 <검은별> 주제가가 절로 떠오른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잡혔다가 사라지네.
어릴 때부터 유행 따르는 것을 꺼려했다. 남들과 같은 걸 입고 같은 걸 쓰면 좀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청개구리 심보가 있어서 그럴까. 달라 보이고 싶었다.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볼까? 나만 달라 보였으면 했다. 이제와 깨달은 건데 어쩌면 그건 확고한 취향도 없고 유행을 따를만한 경제력도 안된 내가 그것을 따르지 않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낸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유치한 이유를 앞세우고 오랜 세월 유행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는데 한국에 오니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저 나는 돈만 준비할 뿐. 시장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이것도 되었다 저것도 되었다, 변신을 거듭하며 새 사람이 되어 갔다.
사람들은 왜 유행을 쫓아갈까. 왜 굳이 비용을 들여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려는 걸까. 그 아래 깔린 심리는 안도감일 것이다. 자신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소외되지 않고 거기에 속했다는 안도감.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계지향적인 한국 사회에서 그 우리 속에 끼지 못하는 건 괴로운 일이니까.
5년 만에 만난 후배 은주는 유행의 선봉에 중고등학생이 있다고 말했다. 애들 학교 갈 때 보면 죄다 검은 반팔에 검은 반바지라고. 초등학교 4, 5학년쯤 잠깐 개성 살려 멋 내는 시기가 있고 6학년부터는 다 똑같아진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기만 특출 나게 보이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란다.
"겨울엔 더 웃겨. 다 펭귄이야. 검은 롱 패딩에 빨간 립스틱."
펭귄들이 남극에 살지 않고 대한민국 교실에 모여 그르렁거리는 상상을 하며 배시시 웃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유행을 따랐지만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안 그랬다면 나는 평생 작은 네모 안경으로만 세상을 바라봤을 텐데 유행 덕분에 동글이 안경도 써보고 일자머리를 부풀려 봤다. 새 안경은 여전히 만화 속 등장인물 같지만 밝은 느낌이 추가되었고 머리는 시간이 지나자 중력에 의해 볼륨이 아래로 쳐지면서 자연스러워졌다. 유행에 민감한 한국 문화 덕분에 판다도 되어 보고 가오리도 되어 보다니, 이러다가 언젠가는 진짜 (사람다운) 사람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