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글음 Oct 11. 2022

유행 민감 대한민국에 관한 고찰

동그라미 그리려다 쓰게 된 새 안경

#사건 번호 1


패션의 완성은 안경. 한국에 온 김에 새 안경을 맞췄다. 작고 네모진 것을 대신하여 붉은 빛깔의 동그란 테가 코 끝에 앉았다. 뭔가 어색한 느낌. 너무 변신했나. 나는 그저 패션을 완성하고 싶었을 뿐인데? 선택의 결과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머리칼을 쥐어뜯을까 고민하는 순간, 새 동글이 안경은 이렇게 속삭이며 염장을 질렀다. 


"동그란 얼굴, 보다 동글게!"

"당신의 다크서클, 더욱더 돋보이게!"


옛날 안경은 썼을 때 아래쪽 테두리가 눈 밑 다크서클(피곤하지 않아도 늘 달고 사는)이 있는 부분과 엇비슷하게 겹쳤기 때문에 나와 마주 보는 사람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새 안경을 쓰니 렌즈 안으로 그것이 쏙 들어와 버렸다. 이런 걸 액자식 기법이라 불러야 하나. 다크서클을 중심으로 안경 테두리가 액자 테두리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아주 광고를 한다. "나 판다요" 하고. 



5년 동안 같은 안경을 썼더니 렌즈에 흠집도 나고 싫증도 난 시점이었다. 그동안 금테, 은테, 뿔테, 무테 등을 거쳐 자줏빛 테에 이르렀으니 이제 다시 사이클을 돌려 금테를 해볼까? 하고 마음을 먹었다. 영국보다는 한국 가게에 한국인의 얼굴에 어울리는 안경이 많을 거라 생각했던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안경점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으니. 


"어서 오세요!" 


친절함이 흠뻑 배어 있는 주인아저씨의 목소리가 아무도 없는 매장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저, 안경을 하려는데요,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 네, 고객님은 도수가 높으시니까 음.......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것 중에 골라 보시겠어요?" 


그는 전문가의 향기를 풍기며 3종류의 테를 탁자 위에 턱 내놓았다. 모양이 모두 동글동글하고 원래 쓰던 것보다 컸다. 직접 써보기도 전에 알았다. 저것들은 모두 나를 명랑 만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것을. 내 얼굴은 동그란 편이고 (나이 들면서) 턱 부분이 네모지게 바뀌었기 때문에 그런 안경테들은 써보나 마나 코믹하게 보일 게 뻔했다. 나에겐 작고 납작하면서도 양쪽으로 살짝 올라간 게 잘 어울린다. 안경 인생 35년 동안 갈고닦은 연구 성과다. 


"혹시....... 더 작은 건 없을까요?" 

"아! 고객님, 요즘 이런 게 유행이라서요. 작은 게 안 나와요. 직접 써보시면 다를 걸요?" 


그는 매장을 바라보며 여기 다 둘러봐도 소용없다는 듯 말했다. 진짜 그랬다. 제법 넓은 매장 곳곳을 샅샅이 뒤져봐도 안경테는 대부분 동글동글 부드럽고 크게 돌아가고 있었다. 납작한 모양이어도 옆으로 퍼진 크기가 커서 내 렌즈 도수에는 맞지 않았다.  


다른 곳을 가? 말어? 가? 말어? 가? 말어? 치열하게 고민하는 찰나의 순간이 하릴없이 지나는 사이, 주인장은 번갈아 가며 내 얼굴에 안경들을 씌웠고 엉겁결에 금테가 아닌 붉은 테를 골라 결제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거기, 서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쩐지 진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상황 종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안경을 새로 하자 길거리에 안경 쓴 사람들만 보였다. 마스크 위로 하나 같이 동그스름한 안경들이 얹혀 있었다. 


 




#사건 번호 2 


패션의 완성은 머리다. (원래 패션을 완성하는 건 좀 많다!) 한국에 온 김에 헤어 스타일을 새롭게 해 보기로 했다. 미장원에 가서 숱 좀 치고 살짝 자를까 했다. 그러나 헤어 디자이너는 S자로 소용돌이치는 나의 속 머리를 들춰 보더니 볼륨 매직을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팔랑팔랑 신나게 귀를 흔들며 홀랑홀랑 그 주장에 넘어갔다. 머리 스타일 바꾸면 기분이 업되지. 해주세요! 두어 시간 후 거울을 봤을 때 알아차렸다. 한국에서는 지금 이런 단발이 유행인가 보구나.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고르게 곡선으로 떨어지는 머리가 아닌 아랫부분에 볼륨이 풍성하게 들어간 스타일. 친구들을 만날 때 자주 보았던 머리다. 그 후 나를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오~ 그거 우영우 머리 아니야?"

"언니, 힙한 머리 하셨군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얼굴은 동그란 편이고 (나이 들면서) 턱 부분이 네모지게 바뀌었기 때문에 그 머리와 나 사이에는 결코 가 닿기 힘든 거리감이 존재했다. 또다시 진 기분이 들었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에겐 찰떡 같이 어울렸던 머리.

얼굴이 갸름한 사람이 하면 무지 세련될 머리. 

그러나 나에겐 아싸 가오리.


양 옆 꼭짓점 붙잡고 꼭짓점 댄스 출 뻔


결론적으로 나는 사건 1과 사건 2를 거치며 "판다 가오리"가 되었다. 포유류와 어류의 컬래버레이션이다. 나는 그저 패션을 완성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은 유행에 민감한 것 같다. 특히 패션 부분에서는 뭐 하나가 뜨면 빨리, 넓게도 퍼진다. 해마다 바뀌는 속도는 또 어찌나 빠른지 명탐정 바베크가 나왔던 만화영화 <검은별> 주제가가 절로 떠오른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잡혔다가 사라지네. 


어릴 때부터 유행 따르는 것을 꺼려했다. 남들과 같은 걸 입고 같은 걸 쓰면 좀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청개구리 심보가 있어서 그럴까. 달라 보이고 싶었다.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볼까? 나만 달라 보였으면 했다. 이제와 깨달은 건데 어쩌면 그건 확고한 취향도 없고 유행을 따를만한 경제력도 안된 내가 그것을 따르지 않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낸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유치한 이유를 앞세우고 오랜 세월 유행과는 거리를 두고 살았는데 한국에 오니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저 나는 돈만 준비할 뿐. 시장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이것도 되었다 저것도 되었다, 변신을 거듭하며 새 사람이 되어 갔다. 


사람들은 왜 유행을 쫓아갈까. 왜 굳이 비용을 들여 다른 사람과 비슷해지려는 걸까. 그 아래 깔린 심리는 안도감일 것이다. 자신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소외되지 않고 거기에 속했다는 안도감.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 <우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계지향적인 한국 사회에서 그 우리 속에 끼지 못하는 건 괴로운 일이니까. 


5년 만에 만난 후배 은주는 유행의 선봉에 중고등학생이 있다고 말했다. 애들 학교 갈 때 보면 죄다 검은 반팔에 검은 반바지라고. 초등학교 4, 5학년쯤 잠깐 개성 살려 멋 내는 시기가 있고 6학년부터는 다 똑같아진다고 했다. 아이들은 자기만 특출 나게 보이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란다.


"겨울엔 더 웃겨. 다 펭귄이야. 검은 롱 패딩에 빨간 립스틱." 


펭귄들이 남극에 살지 않고 대한민국 교실에 모여 그르렁거리는 상상을 하며 배시시 웃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유행을 따랐지만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안 그랬다면 나는 평생 작은 네모 안경으로만 세상을 바라봤을 텐데 유행 덕분에 동글이 안경도 써보고 일자머리를 부풀려 봤다. 새 안경은 여전히 만화 속 등장인물 같지만 밝은 느낌이 추가되었고 머리는 시간이 지나자 중력에 의해 볼륨이 아래로 쳐지면서 자연스러워졌다. 유행에 민감한 한국 문화 덕분에 판다도 되어 보고 가오리도 되어 보다니, 이러다가 언젠가는 진짜 (사람다운) 사람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전 04화 노브라를 선언한 딸과의 전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