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입구 지하철역 2번 출구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뱉어냈다. 이미 많이 쏟아 놓은 것 같은데도 멈추질 않는다. 기계에서 방금 튀겨낸 팝콘처럼 팡팡 터져 올라온 그들은 두 다리를 놀려 바삐 제 갈길을 간다. 길을 건너 9번 출구로 갔더니 거긴 더하다. 짠맛, 단맛, 고소한 맛 막 튀어 넘친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명동, 강남, 잠실, 종로 등의 일대를 돌아봤지만 여기, 홍대입구의 지하철 출구가 가장 핫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엄마, 이제 우리 햄버거 좀 먹으러 가자!"
한국 와서 샤부샤부, 양념갈비, 회, 비냉, 물냉 등의 산해진미를 다 먹였으나 딸들은 "이제" 햄버거 좀 먹자고 졸랐다. 이것은 마치 방금 나열한 산해진미를 다 먹은 나도 결국엔 떡볶이가 먹고 싶은 것과 같은 원리일까? 한번 길들여진 입맛은 우리의 정신과 식욕을 지배한다.
"그래, 가자, 가. 있어 봐. 어디 갈까?"
"맥도널드!"
검색하면 수제 햄버거를 파는 곳도 나오긴 할 텐데 우리는 정통(!) 패스트푸드를 먹기로 했다. 맥도널드는 못 찾았지만 지하철역 근처에 롯데리아가 있었다. 2층 창가에 앉아 햄버거를 먹는 사람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얼마 만에 와보는 곳이야, 이게!
첫째 딸이 돌이 막 지났을 무렵, 이유식 싸들고 남편과 롯데리아에 갔었지. 신나게 햄버거를 먹다가 딸이 이유식 통을 떨어뜨렸는데 하필 그때 싸간 음식이 매생이국. 바닥에 펼쳐진 검디 검은 바다의 향연에 우리 부부는 몸 둘 바를 모르고....... 추억이 방울방울 솟아나려는데 응? 문이 어디 있지? 있어야 할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더듬더듬 빨간 벽면을 따라가자 건물과 직각이 되게 숨어 있는 문이 나타난다. 들어갔더니 더 황당하다. 응? 테이블은 어디 있지? 사람들은? 롯데리아 맞아?
좌우로 살피다가 왼쪽 벽면에 롯데리아 키오스크(무인 주문기)가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오른쪽엔 셔츠며 배지 같은 캐릭터 상품을 팔고 있다. 24시간 무인점포. 파는 사람은 안 보이는데 사는 사람은 가득하다.
입구 쪽에서 바라본 롯데리아 홍대입구점 무인점포 풍경 (왼쪽 사진은 롯데GRS 제공)
"엄마, 나 햄버거 두 개 먹는다?"
내가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보라와 연두는 키오스크 하나를 꿰차고 주문을 시작했다. 언어를 영어로 바꾸더니 자기들끼리 뚝딱뚝딱 잘도 입력한다. 터치스크린에 익숙해서 그런가. 나도 차근차근히 하면 잘할 수 있는데 '앱 제너레이션'인 애들 속도는 못 따라가겠다. 보라의 눈짓에 카드를 꺼내 긁었다. 26,500원. 셋이서 햄버거 먹는데 이 정도라고? 일단 첫 번째 충격. 얘들아, 앞으로 햄버거는 하나씩만 먹는 걸로.
주문번호가 담긴 영수증을 들고 계단을 따라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계단식으로 테이블이 있는데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앉게 돼 있다. 뒤로 벽을 메우는 커다란 스크린도 있어서 마치 삼성전자나 애플의 디스플레이 매장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셋이 나란히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다가 우리 번호가 뜨는 걸 확인했다.
햄버거를 가지러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도 없는데 어디서 받으면 되나 했더니 바코드 찍는 데가 있었다. 불빛 아래 영수증을 가져다 댔더니 바로 옆에 붙은 물품 수납함 같은 픽업 박스 중 하나에서 "똑똑! 노크!"라는 안내문이 뜬다. 화장실 문을 노크하듯 똑똑. 천천히 문이 열리는 것이 제법 장엄하게 느껴진다. 26,500원어치의 양식을 기다리는 자의 숭고함이 주변 공기를 감쌌다.
주문한 햄버거를 받아가는 픽업 박스
이 픽업 박스. 지하철 역에 서 있는 물품보관함 같은 이거. 얼핏 보니 납골당 같이 생겼다. 앞에 붙은 창이 모두 까만색이라 그런 것 같다. 신기하긴 한데 정이 가지 않는 새로운 시스템의 영접, 이게 바로 두 번째 충격이다. 안에 들어 있던 햄버거도 어쩐지 공장에서 만든 완제품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진형 님이 쓴 <AI 최강의 수업>이라는 책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미국 시애틀 등에는 계산대가 없는 무인점포가 여럿이라고. 고객은 그냥 장바구니 들고 물건을 담기만 하면 된단다. 천장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에 달려 있는 카메라와 센서가 행동을 다 살펴서 계산을 해준다는 것이다. 마음이 바뀌어 되돌려 놓은 물건도 파악하는 똑똑한(아직은 오싹하기도 한) 기계들. 몇 년 후엔 <어서 오세요, 휴남동 무인점포입니다>, <마흔에 읽는 AI>, <로봇 관계론>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근데 진짜 내가 놀란 건 따로 있다. 이게 세 번째 충격인데 강도가 가장 세다. 홍대 무인점포를 바라보는 젊은 사람들의 시선이다. 이곳과 비슷한 데가 또 있나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건데, 얘네들은 이게 너무 신선하고 좋다고 한다. 20-30대 사람들이 롯데리아 홍대점을 다녀간 소감을 온라인에 남겼는데 달린 댓글마다 반응이 비슷했다.
"우와, 여기 너무 힙해요!"
"비대면이라니 미래 도시 같아요."
"혼밥 할 때 눈치 안 보고 좋겠어요."
"NCT가 와서 먹고 갈 분위기!"
"뮤비 찍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알았다. 나는 이제 새로운 변화에 거부감이 먼저 드는 기성세대가 된 것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내 입에서는 납골당이니 뭐니 이런 소리가 나올 때 애들은 미래 도시를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인정을 안 할 수 있을까. 한때는 X세대 소리를 듣는 신세대일 때도 있었다는 게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이 흐름이 되돌아갈 리는 없을 것이다. 인건비 절감은 내가 어른이 된 후로 항상 나오는 말이고 코로나 같은 게 또 올 수도 있고. 좋든 싫든 우린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갈 것이다. 앞으로는 동창회도 무인 레스토랑이나 제페토, 이프렌드 같은 메타버스 가상공간에서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편하게 살려면 최소한의 디지털 기술은 익혀놔야 할 것 같다.
그런 기술을 익히는 것을 개인에게 맡기기 전에 공공의 영역으로 확대되면 좋겠다. 나라에서 어르신들 모시고 견학 다니면서 키오스크 사용하는 거 알려주면 어떨까. 영국에서는 일부 카페와 맥도널드에서만 봐았던 키오스크가 한국에 오니 여기저기 널려 있더라. 시간이 가면 더 많아질 텐데 당장 우리 엄마만 해도 사람 없으면 주문하기 힘들어할 것 같다. 누구나 식당 가서 먹고 싶은 걸 먹을 권리가 있다.
또 하나. 지금은 MZ세대가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신세대가 등장할 것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 걔네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안테나를 열어두고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 세대는 나의 딸 보라와 연두가 될 테니. 그렇게 생각하니 홍대입구 롯데리아가 납골당 아니고 미래도시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