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아이들과 인사동 입구에 들어서려는데 왼쪽으로 공사 막이 높게 올라간 게 보였다. 살짝 난 틈으로 눈을 대고 들여다보니 허허벌판이다. 아직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기 전,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예전 건물은 허물어진 뒤였다. 여기, 피맛골 있던 자린데.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피맛골이 사라진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한국에 살았다 해도 자주 와볼 곳도 아닌데 없어진다고 하니까 넘실대는 아쉬움의 근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추억 탓인가.
"엄마, 더워 죽을 것 같아. 빨리 걷자."
연두는 땡볕에 서 있는 내 팔을 잡아끌며 얼른 그늘로 가자고 보챈다.
"좀 있어봐. 여기가 이렇게 변했잖아."
"이렇게가 어떻겐데!"
아쉬움을 달래 보겠다고 사진을 찍었지만 달래지지는 않는다. 곧 이곳에 새 빌딩이 들어서면 예전의 정취는 사라질 것이다. 임금이 말을 타고 다니던 길을 피해 만들어졌다는 피맛골, 잘만 활용하면 관광 명소로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나라 밥을 먹는 이들에게는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모양이다. 차라리 모두 허물고 높은 건물을 짓는 게 경제적으로 낫겠다는 결론이 났으니 지금 이 꼴이겠지.
수학여행 가이드로 일했을 때 경주에 간 적이 있다. 황룡사지에 가면 신라시대 때 만들어졌다던 황룡사 9층 목탑이 있던 터가 남아 있다. 불에 타지 않았다면 꽤 멋진 모습이었을 테지만 직접 가 보면 그저 넓적한 주춧돌만 남아 있어서 상상의 눈으로밖에 볼 수가 없다. 착한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는 임금님 옷처럼 상상을 잘하는 사람에게만 웅장함이 보이는 절이다.
이제 피맛골도 일부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옛 터가 되었다. 그 좁은 골목에서 한 번이라도 더러운 공기를 마시며 국밥에 숟가락 넣고 술잔을 부딪혀 본 사람들, 은밀한 눈빛과 입술을 내어준 적이 있던 사람들의 눈에만 보일 것이다.
20년 전인 2002년 5월 15일, 탑골 공원 앞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내 친구와 서 있던 그는 캐주얼한 양복 차림이었다. 옷이 그거 하나라고 했다. 우산 아래 어색한 인사가 끝난 후 세 사람은 탑골 공원에서 방향을 틀어 피맛골 입구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볶음밥을 먹었다. 밥값은 내가 냈다. 친구는 가고 남자와 나는 남았다.
"막걸리 좋아하세요?"
그렇다는 그의 대답을 듣고 우리는 피맛골의 더 깊숙한 곳을 찾아 들어갔다. 안주로 뭐가 나왔던가, 그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사실은 막걸리였는지 동동주였는지도 모르겠다. 허연 술을 작은 플라스틱 바가지로 퍼 가며 서로의 술잔을 채우던 기억, 곧게 앉았던 자세가 풀어지며 의자 위 양반다리가 되었던 기억, 가치관을 묻고 웃던 기억, 한국 사회의 문제가 어떻고 저떻고... 그러다가 어느덧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기억만큼은 확실하다. 막걸리 값은 그가 냈다.
"노래방 가실래요?"
또 내가 물었다. 노래 좀 한다길래 확인해 보고 싶었다. 노래하는 남자에게 취약한 나, 이 남자가 잘했으면 했다. 나는 너에게 빠질 준비가 되어 있으니 어서 실력을 보여달란 말이다.
"가고는 싶은데... 남은 돈이 이거밖에 없어서요."
그는 지갑을 열어 보였다. 천 원짜리 지폐 몇 장이 보였다. 당시 노래방은 한 시간에 만 원이었다.
"그럼 30분만 해요."
"....... 시간이....... 거기 갔다 오면 택시 타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지금 가도 지하철 끊겼어요. 제가 현금 서비스받으면 돼요. 가요. 우리."
막걸리를 마셨던 곳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노래방에서 30분간 노래를 불렀다. 남자는 기대했던 것만큼 잘 부르지는 못했다.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그동안 만나왔던 남자들도 비슷했으므로 눈 감아주기로 했다. 노래보다 더 잘하는 게 있을 것을 기대하며.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피맛골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비는 그쳤다. 밤공기가 찼지만 좁은 골목을 따라 그날 처음 만나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방 좁은 공간에서 30분 동안 함께한 남자와 나란히 걷다 보니 오히려 덥게 느껴졌다. 큰길로 나가 현금인출기 앞에서 신용카드로 4만 원을 뽑았다. 택시를 잡아탔다. 술기운과 노래 기운이 택시와 함께 종로에서 잠실로 날아갔다. 남자에게 2만 원을 들려 보냈다. 그는 그 돈으로 다시 잠실에서 봉천동으로 갔다. 아름다운 봄밤이었다.
영원한 건 없다. 사람도 늙고 사랑도 변하는데 도시는 두말해 뭣하랴. 필요에 따라 효용성과 경제성을 바탕에 두고 사라졌다 세워졌다 모습을 바꿀 것이다. 이번 여름 눈으로 확인한 한국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내가 떠나온 곳이 맞을까, 저 속에 단 한 번이라도 발을 붙이고 살았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많은 것이 변했다. 지금은 아주 핫한 홍대도 몇 년 후엔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가게들도 마찬가지다. 5년 전에 한국에 나왔을 때는 파리바OO와 O레주르로 빵집이 양분화되어 있었는데 요즘은 두 곳의 위상은 옅어지고 동네 조그만 혹은 아예 규모가 큰 카페형 빵집이 많아진 것을 확인했다. 다이소는 대형화되었고 고급 캐릭터 상점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커피전문점은 너무 다양해져서 이름을 다 외울 수가 없는 지경이다. 몇 년 후엔 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피맛골이 없어진 것도 그렇게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종로 높다란 빌딩 사이로 새로 세워진 "피맛골"이라는 간판을 보니 꾹꾹 눌러 담았던 아쉬움과 함께 화가 나려 했다. 말 타고 임금이 다니기에도 충분히 넓은 길에 나무 기둥 세워두고 이름만 붙여두면 다인가? 차라리 상상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이게 이런 길은 만들지 말지. 나의 추억이 훼손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래서 영국에 있는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모두 일러바쳤다.
"여보, 피맛골 되게 웃기게 됐어! 우리의 장소는 사라졌어. 흐엉엉."
20년 전 나와 함께 멋쩍게 웃으며 볶음밥을 먹고 막걸리를 마시고 노래방에 갔던 남자와 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함께 통탄하며 아쉬움을 나눠 가졌다. 노래를 기대만큼 못했던 그가 건네는 위로는 따뜻했다. 마음은 시린데 남자 덕분에 아름다운 여름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