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 집에 왔다. 젝 러셀 테리어, 이름을 코리라고 붙여줬다. 어른이 되고 나니 내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 손 많이 가는 반려동물은 키울 계획이 없었다.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별생각 없이 8주 된 강아지를 구경 갔다가 덜컥 데려오고 말았다.
새 생명과 한집에 산다는 건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숨을 나눠 쉬며 눈빛을 알아간다"는 의미라는 걸 코리 덕분에 알았다. 우리는 함께 낮잠을 잔다. 같은 소파에 누워 팔베개를 해주면 코리의 눈과 코가 나의 눈과 코에 맞닿는다. 우리 사이에 만들어진 좁은 공간으로 두 코가 모여 함께 잠을 청한다. 내가 방금 내뱉은 공기를 다음번 코리가 들이마시고, 코리가 쏟는 콧김은 어김없이 내 코 안으로 들어온다.
잠들기 전 코리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녀석의 눈을 알아버렸다. 맑고 투명한, 사랑스럽고 장난스러운, 깊고 진지한 눈. 반려인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코리의 눈은 아이들의 눈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동물에게는 표정이란 게 없으므로 모든 것을 눈으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짐작했다.
동물원에 간 날, 우리에 갇힌 동물의 눈에서 코리의 눈을 보았다. 사자, 코끼리, 고릴라, 미어캣 등 어느 동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가느스름하게 뜨고 있는 뱀의 눈도 그랬다. 눈빛이 같다는 건 모든 동물이 코리로 보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플라스틱 빨대를 코에 꼽고 발견된 바다거북의 눈에서도, 호주 산불로 겨우 살아남은 코알라의 눈에서도 코리가 보였다. 지켜주고 싶은 눈이 늘어갔다.
지난 금요일 밤에 영국 초등학교 7학년인 둘째 딸 친구네 엄마들과 저녁에 와인 모임이 있었다. 영국은 초등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반 친구가 바뀌지 않고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1학년 때부터 봐왔던 로건이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날 모임은 로건의 엄마를 떠나보내는 일종의 "굿바이 파티"였다.
각자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브래디드 스칼럽을 시켰다. 간단하게 가리비 튀김이다. 영어로 대화를 해야 하니 온 감각의 세포가 대화에 집중하느라 식욕이 별로 없었다. 반밖에 못 먹고 남겼다. 갈등이 시작되었다. 저 음식을 싸 달라고 할까, 내일 아침에 애들 데워주면 좋아할 텐데.
하지만 끝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웨이터가 와서 다 먹었냐고 물었을 때 그만 "예스"를 해버렸고 음식 접시는 그와 함께 사라졌다. 8명의 엄마들 중 나만 음식을 남겼는데 그걸 싸간다고 하면 궁상맞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영국 엄마들 사이에서 품위를 지키고 싶었던 걸까.
가족끼리 왔으면 당연히 싸갔을 것이다. 싸가지 않았기에 음식은 버려졌을 것이다. 코리의 눈이, 동물들의 눈이 떠올랐다. 지켜주고 싶다며? 뭐 대단한 일을 하려고? 환경부 장관이라도 되시려고? "남은 음식 싸 주세요." 이 한마디 하는 것에서조차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 걸 새삼 깨닫는다. 나는, 아직 먼 것 같다.
※ 이 글은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칼럼으로 익히는 글쓰기의 힘> 5기 수업에서 과제로 제출했던 칼럼입니다. 수업 시간에 강사님의 피드백을 받습니다. 내용을 정리하여 올리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조해 주세요.
<피드백>
반려견의 눈에서 동물의 눈으로, 그것에서 또 기후위기에 생존을 위협받는 동물의 눈으로 생각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이 마치 글의 벽돌을 쌓는 것 같아 좋습니다. 반려견 키우기, 엄마들의 모임 등 경험을 살려 쓰는 일은 독자가 쉽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다만 제목이 아쉽습니다. "지켜주고 싶은 눈" 이렇게 붙여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