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김혜진 장편 소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 나는 이 말을 '부모'보다는 '자식'들 사이에서 자주 들은 것 같다. 그렇기에 자식의 위치에 있는 지인들에게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야지, 부모가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지 않으냐"는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어떨까. 본인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르게 사는 자식을 끝내 받아들여 '지는' 부모가 되까지의 시간은 얼마나 험난하고 심란할까. 김혜진의 소설 <딸에 대하여, 민음사>는 그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서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와 레즈비언이 되어 자신의 파트너를 데리고 집에 들어온, 대학 시간 강사의 해고를 위해 싸우는 딸과의 평행선이 그려진다. 이야기 끝나갈 무렵 멀리서 보면 여전히 두 선은 나란히 달리지만 엄마가 서 있는 평행선의 기울기가 아주 살짝 기울어진 것 같다. 지기 시작한 것일까.
화자인 엄마가 딸이 엇나가는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대목이 나온다.
"어쩌면 딸애는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불필요한 공부를 내가 너무 많이 시킨 걸지도 모른다.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워 버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며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을 엄마의 마음, 그러나 바람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딸을 보며 가졌을 마음이 상상되어 쓸쓸해지기도 했다. 부모의 입장에 감정이입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득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내가 고 2가 되던 어느 날 방에 들어와 느닷없이 "결혼은 안 해도 된다, 여자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며 낮게 읊조리던 장면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뭘 그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아빠와 다툰 날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무경제력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깨닫고 딸은 보다 나은 삶을 살길 바라서 했던 말이었을 것이다.
결혼하고 나서 엄마를 이해할 수 없는 날이 늘어갔다. 여러 면에서 달랐다. 부모 자식 간의 케미라는 게 있다면 우리 엄마와 나는 케미가 좋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깊이 사랑한다. 맞지 않는다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행히 한국과 영국의 거리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딸이 둘이나 되는 나는 어떤 엄마가 되려나. 그녀들도 몇 년 후 "엄마와는 케미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나를 꼰대 취급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미 우리는 각자의 평행선 위에서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만들어 가며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엄마한텐 이겼지만 딸들에겐 질 것 같다.
책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