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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

비 온다고 피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

by 영글음

남편이 에든버러에 직장을 구해 이사를 준비할 무렵, 사람들은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걱정스레 말하곤 했다. 영국은 하루 종일 비가 온단다, 맨날 흐려서 우울증 환자가 많다더라, 그런 날씨 나 같으면 못 살 텐데 너는 적응할 수 있겠니 같은 날씨에 대한 이야기였다. 살기 좋은 곳이란 말을 들어도 힘을 낼까 말까 하는데 오기 전부터 악평만 잔뜩 들었다.


와보니 과연 명성을 날릴 만하긴 했다. 하늘은 원래 하얘서 하늘이라고 하나 싶을 정도로 구름 가득한 날이 많았다. 도착한 첫날에도 비가 내렸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비가 자주 오긴 하는데 하루 종일 오는 건 흔치 않더라. 흐리고 습한 날 사이사이로 눈부시게 푸른 하늘도, 켜켜이 펼쳐진 이쁜 양떼구름도 종종 볼 수 있다.


좀 살아본 결과 영국 날씨를 제대로 표현하자면 "지랄 맞은 변덕쟁이" 쯤 되시겠다. 어쩔 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맑은 하늘이, 왼쪽으로 돌리면 우중충한 하늘이 동시에 펼쳐지기도 한다. 맑아서 룰루랄라 했는데 집 밖으로 한 발짝 떼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하거나, 우산을 펼쳤는데 햇빛이 들면 정말이지 배신감 같은 게 뱃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날씨가 안 좋기로 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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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국 날씨의 주연 배우는 따로 있으니, 다들 예상하시려나. 그렇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왔다가 사라지지도 않고 어찌나 자주, 세차게 불어대는지 직접 와보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다. 아무도 바람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바람의 위력은 대단하다. 뒤에서 불면 걷지 않아도 걸을 수 있다. 등 뒤에서 누가 떠미는 것 같다. 앞에서 불면 1초 만에 머리를 미친년 꽃다발로 만들어 놓는다. 애써 머리를 매만지고 나왔는데 이러면 참, 허무하기 짝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 머리도 그렇게 해놔서 견딜 만하다.


최악의 상황은 비와 바람이 만났을 때다. 이 둘이 합작 공세를 펼치면 우산을 써도 쓴 것이 아니요, 툭하면 뒤집어지는 우산을 잡고 바람이 끄는 데로 질질 끌려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 십상이다. 이런 날 우산은 한낱 들고 다녀야 하는 막대기일 뿐이다. 오히려 짐이다.


상황이 이러니 이곳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우산을 쓰지 않는다. 대신 모자가 달린 외투를 즐겨 입는다. 비가 올라치면 얼른 모자 하나 뒤집어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제 갈 길을 간다. 그러다가 비가 그쳤을 땐 모자만 벗으면 끝. 가격에 따라 방수력이 다르긴 하지만 웬만한 정도의 "워터프루프"는 외투의 기본 사항이다.


썸 타는 남녀가 갑작스러운 비에 남자의 재킷 하나로 비를 가리며 함께 달려가는 장면. 우리나라 영화 속에서는 자주 등장하지만 영국의 남녀라면 각자 모자를 눌러쓰고 빗속을 걸을 것이다.






에든버러에 온 지 두어 달 되었던 겨울 어느 날, 그땐 아직 차를 사지 않아 어디든 걸어서만 다닐 때였다. 큰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야 하는데 비가 퍼부었다. 바람은 너무 세서 길거리 쓰레기통이 나뒹굴 정도였다. 둘째는 아직 유모차를 타야 했다. 방수 커버가 없었다. 아이는 졸린다고 칭얼거렸다. 여행용 파란색 우비를 활짝 펴 유모차 위를 덮고 걸었다. 바람 때문에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인데 유모차를 끌고 오르막길을 가는 건 고문이었다.


그러다 사거리에서 길을 건너려는데, 고정시켜놓았던 우비의 한쪽 끝이 빠져 하늘을 향해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그 탓에 유모차의 덮개마저 뒤로 젖혀지면서 안에서 자고 있던 아이는 날벼락을 맞았다. 때마침 유모차 바구니에 있던 무릎담요가 날아가 물에 젖은 도로 한가운데 떨어졌다. 한국에서 산 점퍼는 속까지 젖었고 신호는 바뀌어 빨간색이 되었다. 네 방향의 모든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하고 사거리 한 복판에 선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찰나, 모든 사물이 움직임을 멈추고 오직 비와 나만이 숨을 쉬었다. 여기서 나는 무얼 하고 있지? 남편은 왜 이 나라에 취직이 된 걸까. 주저앉아 울어 버리면 다음날 뉴스에 나오려나. 오만가지 생각을 했지만 3초 후 흙탕물에 흠뻑 젖은 담요를 얼른 주워 담고 나는 길을 건넜다.


가끔 비 내리는 하늘을 보고 있으면 그날이 떠오른다. 생소한 땅에 도착하여 불안과 희망이, 긴장과 평온이 밀가루 반죽처럼 한데 뭉쳐 있던 때였다. 아이가 어려 육아에 힘이 부치기도 했고, 적응한답시고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을 때라 마음의 여유 같은 게 없었다. 유모차는 정리한 지 한참 되었고 이제는 자가용이 있으니 비 오는 거리를 걸으며 쫄딱 젖을 일은 없다.


사거리 유모차 사건이 있던 해에 둘째 어린이집에서 농장으로 소풍을 간 적이 있다. 자원봉사를 하기로 해서 같이 다녀왔는데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였지만 맞고 있으면 흠뻑 젖는 비였다. 소풍이 취소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 나는 오른손엔 내 딸, 왼손엔 다른 집 딸의 손을 잡고 농장에 가야 했다. 비는 모두 함께 골고루 나눠 맞았다. “오늘 비가 와서 소풍 취소될 줄 알았어요.” 선생님에게 말을 건네자 돌아온 대답.


어머, 여기 스코틀랜드예요. 비 신경 쓰다간 아무것도 못하지요. 즐기세요!


이 진리를 좀 더 빨리 알았다면 그날 사거리 한복판에서 하하하 크게 웃을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젖으면 좀 어때.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5년을 살다 보니 그 정도쯤은 별 일 아닌 것으로 받아칠 여유가 나에게도 생겼단 말이다! 가만히 손가락을 펴 승리의 브이를 만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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