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글음 Jul 25. 2023

해질 무렵, 끈적한
유혹의 순간을 아시나요

빼곡한 일상에서 뒤를 돌아보다

계절마다 다르긴 하지만 저녁 6시에서 7시 무렵의 시간을 좋아했다. 아직은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 그러나 어둠이 막 깔리면서 세상의 채도가 낮아지기 시작하는 무렵의 짧은 순간을 말이다.


거리의 상점들은 하나, 둘 간판 불을 밝히고 빛 탐지 센서가 있는 가로등도 끔뻑 켜지는 시간. 남아 있는 밝음 때문에 빛은 아직 빛의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지만 도시의 골목, 골목에 자리한 술집들은 일상에 지친 손님 받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곧 완벽한 어둠이 찾아올 거라는 두근거림이 가득 차고, 끈적끈적한 밤의 유혹이 윙크를 하는 순간이다.


알 수 없는 어수선함과 차분함, 생기와 사기가 넘실대는, 이브닝과 나이트의 그 비좁은 찰나가 좋았다.


소풍 가기 전날 벅차오르는 가슴을 눌러앉고 잠을 청하느라 이리저리 뒤척였던 어린 시절의 한 때처럼 검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화려한 네온사인이 켜질 때 나는 자주 들떴던 것 같다. 오늘은 뭔가 재미있는 일이 펼쳐질 것 같은 예감이 들곤 했다.


물론 대부분의 하루는 별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일상이라는 꼬리표에 맞게 평범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시간만이 주는 콩콩거리는 느낌이 좋았고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밤의 유혹을 덥석 잡았으면 했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그런 시간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한국에 있을 땐 어느 때부터인가 애 엄마, 안대리 하느라 바빴다. 미국에서는 첫 해외생활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스코틀랜드에 와서는 그런 순간 자체가 불가능했다. 여름이면 밤 11시인데도 하늘에 푸른빛이 남아 있고, 겨울에는 오후 3시 반부터 어두워지니 어떻게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에든버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나. 공항 옆을 지날 때였고 해는 하늘 저편으로 낮아지고 있었다. 운전 중이었다. 퇴근 시간에 걸려 차는 거북이걸음이었다. 내 앞으로 주룩 선 차들 뒤꽁무니에서 불은 빛들이 더 진하게 느껴질 무렵, 공항 바로 옆에 붙은 도로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그때 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가 눈앞에서 붉은 석양과 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의 빛이 한데 섞이자 나는 자동차 창문을 뚫고 공간이동을 했다. 아직은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 그러나 어둠이 막 깔리면서 세상의 채도가 낮아지기 시작하는 무렵의, 서울 한 복판으로.


오래도록 기억 속에 파묻혔던 그 시간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가슴이 콩콩거렸다. 천천히 달리는 앞차의 속도를 따라 나도 천천히 따라가며 "맞아, 그땐 그랬지"하고 엷게 읊조렸다. 조금 더 들떴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미치게 그리웠다.


그런데 무엇이 그리웠던 건지 헷갈렸다. 옛날에 느꼈던 그 감정 자체였을까? 그걸 경험했던 한국이라는 장소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 시간을 좋아했던 젊은 시절의 내가 그리웠던 걸까? 그리움의 모호한 경계에서 조금 눈물이 났다.   


운전을 해야 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행이었다. 이런 추억마저 없었다면 외국살이가 더 팍팍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과거의 순간을 포착하여 촉촉이 감상에 젖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마흔 플러스알파의 나이는 빼곡한 일상으로도 삼십 대만큼이나 충분히 바쁜 나이니까. 지금보다 더 자주 멈춰서 뒤도 돌아보고 하늘을 올려다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점점 나이 드는 것도 안타까운데 감정마저 메말라 버리는 건, 두렵다.  




라고 2019년 8월 22일에 쓴 글입니다.

더이상 나이드는 게 안타깝지는 않습니다.

아직 감정도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길을 가다 소떼를 만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