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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Oct 16. 2023

수납함을 수납하며 살고 있구나

"수납함이란 무엇인가?"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다 위와 같은 심오한 문제와 맞닥뜨렸다. 그것은 물건을 넣어두기 위한 상자 같은 걸 뜻한다. 주로 분류를 잘하기 위하거나 '기타 등등'에 해당하는 잡동사니 즉, 오갈 데 없는(?) 것들을 보관하기 위해 수납함을 산다. 여기까진 오케이. 


그런데 왜? 우리 집에는 이다지도 많은 수납용품이 존재한단 말인가?


텅텅 비었으나 당당히 부피를 차지하고 서 있는 수납함을 보라! 약 20개.


 정리 10개월 만에 쓰지 않는 갖가지 상자와 바구니를 모았더니 안방 바닥의 절반이 차버렸다. 종이나 플라스틱, 철제 등 재질도 다양, 손바닥만 한 것에서부터 내가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큰 것까지 크기도 다양, 뚜껑이 달린 것 혹은 없는 것 형태도 다양한 것을 보니 나라는 인간, 참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며 살아왔구나, 하는 자각도 덤으로 얻었다. 


물론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 예전에는 저 안에 물건이 가득 차 있었지만 이제는 텅텅 비었다는 건 내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라는 소리 아니겠냐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싶다. 


다만, 비어 있는 수납함 자체를 처분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쑤셔 박아 보관을 해 온 게 기가 막힐 뿐이다. 옷장 2개는 거뜬히 채울 것 같다. 솔직히 한 곳에 모으기 전까지는 이렇게 많은지도 몰랐다.


대학교 1학년 때 거짓말처럼 세상을 등진 가수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읊조렸다.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나는 이렇게 목놓아 부른다. 


"♫ 매일 (수납함을) 수납하며 살고 있구나! ♪" 


광석이 오빠~~~~~~!


미니멀리스트의 길을 걷다 보니 수납함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투명 혹은 반투명한 것은 속이 다 보이는 탓에 지저분해 보여서 싫고 불투명한 것은 열어보지 않고서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기억조차 안 나는 게 별로였기 때문이다. 


장롱이나 창고 속에서 크기가 다른 수납상자들이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는 걸 보면 열고 싶은 욕구가 싹 가셨다. 문만 닫으면 눈앞에서 사라지니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게 뭐람.  


작정하고 집 정리를 시작하며 수납함을 열자 하나둘 진실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보관만 하고 쳐다보지도 않은 것, 앞으로도 절대 사용할 것 같지 않은 것, 분류나 정리가 되지 않고 그저 한데 모아놓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필요할 거 같아서."


물건 정리가 힘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지금 당장 버리면 훗날 꼭 필요해서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물건만이 아니라 수납함에도 해당되는 얘기였다. 아직 집정리가 끝난 게 아니니까 언젠간 필요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텅텅 비어버린 수납함도 차곡차곡 모았더니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젠 어쩔 수 없다. 저것들을 도로 어딘가에 넣을 생각을 하면 어휴, 손사래가 절로 쳐진다. 이참에 마음 단단히 먹고 쓸 것만 남기고 처분하려 한다. 




초등학교 졸업 후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다. 결혼 전까지 일반 주택에서 살았고 결혼 후에는 빌라, 대학교 기숙사 등을 전전했다. 미국, 영국으로 왔더니 내가 사는 곳에는 한국 같은 고층 아파트가 없다. 그런 까닭에 부모님이 살던 주택을 정리하고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다음과 같은 단어를 듣게 되었는데 그게 뭘까 되게 궁금했다.  


알파룸. 팬트리.


'알파룸'은 아파트 설계도 상에서 남는 면적을 모아 만든 자투리 공간이고 '팬트리'는 식료품을 보관하는 붙박이 수납장 같은 곳이라는 걸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게 있다는 건 수납공간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부러웠다. 우리 집에도 알파룸이 있다면 서재나 창고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고 팬트리가 있어서 식재료가 가득 차 있다면 뿌듯할 것 같았다. 


자료 이미지 - 집이 이렇다면 미니멀리스트 안할래


하지만 미니멀리스트가 되니 생각이 달라졌다. 수납할 공간이 많다는 건 쟁일 수 있는 물건의 수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미니멀 라이프 관련 커뮤니티에는 집이 넓어지니 물건이 많아져 오히려 관리가 힘들다는 글이 종종 올라온다. 


더 이상 물건에 나의 공간을 내어주고 그것의 포로가 되고 싶지 않기에 수납할 공간이 없어도 괜찮을 정도의 짐만 갖고 살고 싶다. 


우리 집은 4인 식구에 30평이지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탓에 모든 공간이 아담하다. 창고도 작아 미니멀리즘을 실천이 더욱 절실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정도의 크기도 충분하게 느껴진다. 알파룸, 팬트리 없어도 된다.  


같은 맥락으로 수납함이 많다고 수납을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것만 믿다가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 쑤셔 넣기만 할 수도 있다. 수납함도 물건이다. 결국엔 어딘가에 공간을 들여 보관해야 한다. 그걸 잊지 않는다면 차리라 내용물도 정리하고 수납용품도 함께 정리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면 어떨까?  


정리 컨설턴트인 곤도 마리에는 자신의 저서 <정리의 힘>에서 수납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납법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물건을 안에 넣어버리면 언뜻 정리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수납 제품의 내부가 꽉 채워질 무렵에는 다시 방이 어수선해지고, 또다시 안이한 수납법으로 내달리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수납을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수납해 놓은 물건을 정리하는 게 핵심이다. 쓰지도 않을 물건을 아무리 잘 정리해 둔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중에 열어보고 깜짝 놀라기나 하겠지. 내가 이런 것까지 쟁여놨다 싶어서. 그리하여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님아, 그 수납함 함부로 들이지 마오!" 


제 꼴 납니다. 





<미니멀 라이프에 관한 짧은 고찰> 연재 안내 

극강 맥시멀리스트의 으라차차 미니멀 라이프 도전기와 그에 관한 짧은 생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머, 쟤도 저러고 앉았네?” 저의 글이 누군가에게 이 정도만이라도 가닿는다면 “땡큐 베리 머치”를 외칠 기세라지요? 매주 월요일에 올리고 화요일에 연재됩니다. 2023년 12월, 밀리 오리지널 <큰 집으로 갈 수 없어 미니멀 라이프>가 출간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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