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천사와 악마가 산다. 각각 귀 한쪽씩을 잡고서 그들은 속삭인다. 영화나 TV를 보면 천사는 하얀 옷을 입고 착해 보이며 악마는 빨간 옷을 입고 눈꼬리가 올라갔던데, 현실에서는 좀 다른 것 같다. 천사는... 모르겠다. 다만 내 귀에 대고 자주 속삭이는 현대사회의 악마는 잘 생겼다. 목소리가 마음을 녹인다. 공손하기까지 하다. 하루는 쇼핑몰에 갔는데 현빈 목소리의 악마가 소곤댔다.
"유독 힘든 하루였죠? 자신을 가꿔봐요.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이 블라우스를 사세요. 똥배가 가려질 거예요. 컨실러로 기미도 가려보는 건 어때요? 저는 알아요. 당신은 지금, 이게 필요해요."
헛! 현빈은 귀신이다. 내게 기분전환이 필요한 걸 어떻게 알았을까? 기미 주근깨로 고민하는 건 또 어떻게? 장바구니에 담는다.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생각조차 안 하던 옷, 컨실러가 갑자기 필요한 물건이 되었다. 띠이-익. 신용카드가 결제될 때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에 엔도르핀이 퐁포로롱. 어떤 날은 거친 원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투 플러스 원,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야. 오늘을 잡아! 얼마면 돼?"
"오늘을 잡아"가 "내 손을 잡아"로 들린다. 잡으라는데 기꺼이 잡아야지 그럼. 얼마면 되냐고? 무슨 소리. 돈은 제가 낼게요. 띠이-익. 신용카드가 결제될 때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에 이번엔 도파민이 퐁포로롱. 기분 좋다. 싸게 샀다. 돈 벌었다. 응? 돈을 썼는데? 응? 나 돈 썼다고. 그랬구나. 또.
요즘 우리 집 중학생 둘째 딸에게도 달콤한 악마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 같다. 10대 전용 악마들은 틱톡 안에 산다. 내가 직접 들은 적은 없으니 누구의 목소리를 닮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자기 방에서 한참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방 밖으로 나온 딸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스미스키 더 갖고 싶다."
지난해 여름과 올봄 한국 갔을 때 교모문고 핫트랙스에서 야광 피겨를 몇 개 사줬는데 그게 더 갖고 싶단다. 틱톡에 나왔다고 한다. 주제별로 랜덤 판매 방식이라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사서 뜯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4개만 샀다. 그걸 못내 아쉬워했는데 악마가 콕 집어 스미스키를 논하다니! 아마존에서 검색을 한 딸은 한국보다 4배나 비싼 가격을 확인하고는 좌절하며 컴퓨터 화면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려다 입술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 그나마 다행이다.
머리칼도 없는 스미스키들
돌이켜 보면 나나 딸이나 소비 혹은 소비욕구의 순간 앞에 천사의 목소리는 개미처럼 들려 그것이 천사인지, 지나가는 바람인지 구분이 어려울 때가 많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소비는 일상이니까. 그까짓 것 사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제는 무엇을 사는지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세상이니 말이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산다는 데 누가 뭐래.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19세기 대중이 노동자가 됨으로써 근대인이 되었듯, 20세기 대중은 소비자가 되면서 현대인이 되었다고 했다. 후유, 큰일 날 뻔했다. 소비하지 않았다면 근대인으로 살 뻔했잖아? 당당히 현대인의 틈에 끼어 미래에 벌어야 할 돈으로 신용을 얻은 카드를 살랑살랑 흔들어 재끼며 나와 당신, 우리는 매일매일 물건을 사 재낀다.
이 시대의 소비는 너무 쉽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훌륭한 마케터, 데이터 전문가들은 뇌과학까지 동원하여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찔러줘야 고객님들이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지 연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바일 장치의 GPS를 이용해 움직임을 추적하여 내가 어떤 광고판을 지나고 있는지까지 꿰고 있다가 광고 메시지를 보내주신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마케터님들이시다.
그렇게 소비자가 된 현대인들은 온오프라인 쇼핑몰을 둘러보기만 해도 마음 저 깊은 곳에서 구매 욕구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며, 없었던 필요를 창조해 내고, 사야 할 당위성을 부여한다. 그러는 사이 자본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굴러가고 시장경제는 더욱 발전해 간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방송과고진흥공사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1년 대한민국의 국내 방송통신광고비가 약 15조 5,174억 원으로 나타났다. 2017년엔 12조 7,535억 원이었으니 4년 사이 약 21.7%가 오른 셈이다. 이야, 신난다! 저출산으로 인구도 줄어든다는데 1인당 보고 들어야 할 광고수는 더 늘어난 세상에서 살게 되었다. 이 얼마나 기쁘지 아니한가! 어디를 둘러보든 광고, 광고, 광고, 마케팅, 마케팅이다. 살 것 천지다!
누구는 단군 이래로 돈 벌기 가장 쉬운 시대라고 하는데, 알고 보니 맥시멀리스트 되기 가장 쉬운 시대다. 아무 노력이 필요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된다. 사과가 익으면 떨어지듯, 비가 오면 땅이 젖듯, 요즘 시대의 물건 사기는 어떤 면에서는 자연법칙에 가깝다고 생각될 정도다. 그러니 굳이 "나는 맥시멀리스트가 되겠다"라고 선언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되는 게 자연스러운 거다.
나라고 다르지 않았다. 한국에서 10평 남짓의 빌라에 살다가 유학생 남편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뒤, 이곳 영국에 자리 잡을 때 미국에서 온 이사박스는 80개 가까이 되었다. 짐을 싸면서도 "우와, 물건 되게 많다!"라고 혀를 내둘렀지만 당시 느낀 감정은 어이없게도 자부심이었다. 남편과 내가 이 많은 짐을 잘도 정리하며 살았다니, 혁신에 가까운 기술을 습득한 것 같아 뿌듯했었다.
작년 어느 날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잘못 생각한 게 있다. 짐을 파격적으로 줄여 정리를 한 번만 하고 나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지며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다른 한 편에서 날마다 이루어지는 소비를 얕잡아봤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미니멀리즘은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일이다. 삶을 단순하게 만들고 집에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꾸준한 정리라는 새로운 습관을 들이고 불필요한 소비를 막아야 한다. 언제든 마음을 풀어버리면 금세 맥시멀한 삶으로 돌아가기 쉽다. 한참 줄이고 절약하다 보면 "이 정도는 사도 되지 않나?" 하는 보복소비의 심리도 불쑥 나타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오랜 시간 소비 요정으로 살아온 나이기에 구매의 순간 앞에 매번 따지고 고민을 한다는 게 번거롭기 짝이 없지만 실천하며 느끼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트에서 카트에 담았던 물건을 도로 매대에 올려놨을 때 해냈다는 성취감마저 든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현빈도, 원빈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악마가 아니라 마케팅 요정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소비를 통해 현대인이 되었다면, 의식적으로 소비를 줄임으로써 우리는 무엇일 될까. 탈현대인? 포스트모던인? 발음도 안 좋고 부르기도 애매하니 에잇, 그냥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겠다. 요요현상 일어나지 않게 부지런히 애쓸 테다.
* 이 글은 2023년 12월에 밀리 오리지널로 출간이 예정된 <큰 집으로 갈 수 없어 미니멀 라이프>에 실린 글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