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미니멀리즘에 도전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 나처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강한 사람을 종종 만난다. 읽지 않더라도 물성으로 된 책을 집에 모셔두고 눈으로 확인하면 마음이 꽉 차오르걸 느끼는 이들이다. 그러다 보니 책값은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다른 물건은 안 그런데 신기하게도 책만큼은 나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명품백 하나 없어도 책장을 꽉 채운 책들을 보면 부자가 된 기분이었고 내가 읽은 책은 곧바로 내가 되는 것 같았다. 종이와 글씨로 된 분신이라고나 할까.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이 책장을 구경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의 본질을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해외 살면서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가 바로 한국 책구매를 바로바로 못한다는 점이었다. 책값보다 비싼 배송료를 내가며 몇 번 주문한 적도 있으나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자연스럽게 이북을 읽기 시작했다. 현재 <밀리의 서재>를 구독하며 <예스 24>에서 별도 구매할 때도 많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은 주로 30대에 읽었던 것이다.
지하나 다락방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한 층 전체를 서재로 만들어 더 많은 책을 들이고 싶다는 꿈을 꾼 적은 있지만 가진 책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짐 정리를 시작한 지 이제 1여 년이 다 되어간다. 그 사이 물건을 대하는 태도가 크게 변했다. 필요가 없는 물건을 굳이 갖고 있는 것은 공간낭비라 여기게 되었다. 책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책장에는 첫 장도 펴지 않은 책이 꽤 있다. 지금은 인생 최고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시간이 흘러 여유가 생긴다 해도 절대 읽을 것 같지 않은 책도 보인다. 그것을 정리하자. 그 끝에 책장에 공간이 생기면 더 읽고 싶은 책을 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래도 책인지라 물건 정리 중 가장 힘들 거라 예상하여 정리 컨설턴트인 곤도 마리에의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집에 있는 책을 모두 꺼내 안방에 모은 뒤 한 권씩 잡고 넘겨 보면서 설렘이 남아 있는 것은 보관하고 그렇지 않은 건 정리하는 것이다. 안방과 첫째 딸, 둘째 딸 방에 나눠져 있던 책을 한 군데 모았다. 먼지에 숨 막히기 싫어서 일일이 닦아내며 꺼내느라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어라, 별로 없네? 350여 권? 미국에서 영국으로 이사 올 때 한번 정리를 해서 그랬는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집에 2만 3천여 권의 책이 있다고 하던데 그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새발의 피. 개미의 눈물. 그냥 다 갖고 살까? 잠시 흔들렸으나 꺼낸 노동이 아까워 정리를 해보기로 했다.
먼저 인생책이라 꼽을 수 있는 책을 골라냈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 없는 세상>, 제인 구달의 <희망의 밥상>,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할 길>이다. 20대까지 거의 책을 안 읽던 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30대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특히 이 세 권은 지금까지도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책들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실천 없이 책만 읽는 것이 “인식->실천->인식->실천”의 과정 대신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오히려 현실의 땅을 잃고 공중으로 관념화해 간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이 책을 나에게 선물한 선배는 안쪽 여백에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고 싶다면 반드시 읽어볼 책”이라는 글귀를 남기기도 했다. 언젠간 꼭 다시 읽어보고 싶다.
<인간 없는 세상>은 통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 인류의 문명이란 것이 인간 입장에서 본다면 발달이요, 진화이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파괴요, 피정복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불어 식물의 힘이 얼마나 강한 지도 알게 되었다. 작년에 마당 구석에 그냥 놓아둔 잡초가 올해 무성해진 것을 보며 항상 <인간 없는 세상>의 풍경을 떠올리곤 한다.
<희망의 밥상>은 현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밥상을 추구해야 하는지, 어떤 밥상이 미래를 살리고 지구를 살리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으로 처음 세계 식량의 불균형과 공장식 축산업의 위험성 등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더 많은 관련 책을 읽게 되었다. 그 밖에도 김애란, 박민규, 성석제, 천명관, 오쿠다 히데오, 위화, 주제 사라마구, 할레드 호세이니 등의 작가가 쓴 소설책들이 차례차례 뽑혀 도로 책장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나온 구절 덕분에 나는 이제 쉰이 되어도 예순이 되어도 늘 헤맬 거라는 사실을 안다. 거기서 뭐라고 했냐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막다른 골목을 마주했을 때, 혹은 절망의 벼랑 끝에 섰을지라도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겐 아직도 가야 햘 길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확실히 어떤 건 집자마자 버릴 것이라는 감이 왔다. 선물 받은 책은 90% 이상이 그랬다.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노엄 촘스키의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1, 2, 3은 추천받아 사기는 했지만 관심분야가 아니라 손도 안 댔기에 이번에 안녕을 고했다.
이렇게 시간을 들여 책을 정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의 30대 시간과 재회한 기분이 들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맘이 되어 집에서 애만 키우던 막막함을 독서로 달래곤 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를 위로하고 나를 성장시킨 책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처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책조차 오랜 시간을 들여 꼼꼼히 살피게 되었다. 책을 읽고 서평도 꼼꼼히 남겼기에 내용이 기억이 안 나면 티스토리 블로그로 달려가 글을 읽으며 다시 음미하는 시간도 보냈다.
350여 권 중 200권 정도를 정리했다. 미니멀리스트 고수들은 책 한두 권만 남기고 모두 정리하기도 하던데 아직 하수인 나는 그렇게까지 하기는 어려웠다. 저마다의 방식이 있고 나 또한 바뀔 수도 있기에 이번엔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스코틀랜드라 아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진을 찍어 갖고 싶은 책이 있는지 물어본 뒤 전달했다. 일부는 한글학교에 기증하기도 했다. 그러고도 아무도 찾지 않는 책은 책 어쩔 수 없이 도서 수거함에 넣었다. 차마 내 손으로 쓰레기통에 넣을 수는 없어서 영국 사람들에게 내 책의 마지막을 부탁한 셈이다. 부디 기부하는 곳으로 가서 새 주인을 만났으면 좋겠다.
이 글은 책을 떠나보내기 위해 치른 일종의 의식이다. 글과 사진으로라도 남겨놔야 더 잘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책 정리를 하며 나의 30대를 잘 흘려보냈다. 이젠 더 다양하고도 새로운 책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채우기 위해 비운다는 말의 의미가 한발 더 가깝게 다가온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