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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Dec 05. 2023

수세미 없어서 설거지 못하는 귀신이라도 붙었나

그랬던 거야. 내가 여태 설거지를 잘 못했던 건 수세미가 없어서였던 걸 거야. 그래서 그릇 좀 깨끗하게 닦아 보겠다고 이렇게나 많은 걸 사모은 게 분명해. 양손에 수세미를 하나씩 잡고 세제 살짝 묻혀 소림사 주방사처럼 공중으로 두 손을 휙휙 몇 바퀴 돌리면 수육 삶았던 기름기 가득 커다란 들통도 말끔히 씻겨져 있을 거 아니겠냐고. 


그런 무공을 익혀 '주부의 신'으로 거듭나고 싶었나 보아. 나도 몰랐던 내 속마음이 그랬나 보아.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 집에 쌓인 30개가 넘는 수세미를 설명할 길이 없어. 혹시 또 모르지. 전생에 수세미 없어서 설거지 못하는 귀신이 붙었는 지도.  


철 수세미랑 실리콘 수세미는 다른 곳에 있어서 사진에서 빠짐!

 

미니멀리스트가 되겠다고 지난 1년 간 집구석구석을 탈탈 털었지. 그러던 중 희한한 것들과 자주 마주했다. 이를 테면 언젠가 선배가 책과 함께 보내준 분홍, 초록 때수건들, 지금은 쓸 일이 없는 카시오 전자사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이사 갈 때마다 싸들고 온 4개의 노트북 같은 것들. 


그중 단일 품목으로 가장 숫자가 많았던 건 수세미였다. 한국 수세미가 질이 좋다는 말은 어디서 들어가지고 한국에 갈 때마다 마트에 들러 조금씩 조금씩 사서 영국으로 가져왔다. 사용하는 속도보다 구매하는 속도가 빨랐다. 몇 년째 쌓였다는 걸 모르고 있다가 몇 달 전 주방 청소를 시작하며 알게 되었다. 들어는 봤나? 수세미 덕후? 그게 바로 나다.  


불현듯 이런 의혹이 뇌리를 스친다. 혹시 내가 오버하는 거 아닐까? 누구나 이 정도쯤의 수세미는 집에 쟁여놓고 사는 거 아닐까?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필히 제보를 바란다. 이 정도면 보통인 건가요?  


이런 상황이 코미디인 이유는 따로 있다. 요새 바빠서 배달시켜 먹을 때가 많다. 본격적인 설거지는 식기세척기 이모님이 하신 지 9년 째다. 식기건조대나 싱크대 청소는 싸구려 칫솔을 사용하는 편이다. 말인즉슨! 이토록 화려하기 짝이 없는 수세미를 쓸 일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결심했다. 수세미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세균의 수가 화장실보다 많네 적네 하는 기사가 종종눈에 띄던데 자주 바꿔주겠어. 솔직히 수세미 하나당 두세 달씩은 쓴 것 같다. 이제는 한 달에 1-2회는 새 수세미를 사용하여 기분도 상큼하게 주방은 깔끔하게 해주겠어! 2년이면 다 쓰려나?! 


작년 이맘때 샴푸 대신 샴푸바를 쓰겠다고 결심했지만 그간 쟁여놓은 샴푸, 린스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 까닭에 시작도 못했다는 건 떠벌리지 않으련다.


지금까지 전(!) 맥시멀리스트의 현(!) 미니멀 라이프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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