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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Sep 04. 2019

존버에 버금가는 '하이 바이 정신'을 아시나요

아이를 새 학교로 전학시키며

교장을 따라 교실에 도착했다. 담임 교사는 해리 포터에 나오는 아이들이 쓰는 것 같은 영국식 억양이 담긴 영어를 쓰며 우리를 맞이했다. 그 뒤로 60개의 어린 눈동자들이 딸과 우리 가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2학년이지만 학교를 일찍 시작하는 스코틀랜드에서 우리 딸은 4학년으로 들어갔다. 교실 안에는 동양 학생이 없었다. 딸보다 내가 더 떨렸다. 덜덜덜덜... 영국 와서 일주일 동안은 여행객처럼 여기저기 구경하고 신기해하느라 재밌기만 했는데 우리 가족이 앞으로 맞이해야 할 현실을 그날 교실에서 처음 느꼈다.


영국 초등학교는 학년이 올라가도 반 구성원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다.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는 있지만 대부분 6-7년 이상을 같은 아이들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다가 졸업한다. 이 사실을 알고 처음엔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한국처럼 새 학년이 되면 반 친구들도 바뀌고 해야 적응력이 생기지 이게 뭐람! 딸은 3년 동안 이미 친해져 있는 아이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딸, 잘할 수 있을까? 엄마로서 걱정이 태산이었지만 정작 아이는 나름의 방식으로 잘 적응해 갔다. 좋고 싫은 게 확실한 아이라 마음에 맞는 소수의 아이들을 찾아 친구를 만들었다. 전학 초기에 몇몇 여자애들이 자기들끼리 결성한 클럽에 딸아이를 끼워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지만 내려앉은 건 내 심장뿐, 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클럽은 곧 해산되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나처럼 반 친구 모두와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영국에서는 등교와 학교를 부모가 책임진다. 아침마다 아이 손을 잡고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면 아이가 줄을 서 있다가 학교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부모들이 지켜보며 서 있는다. 오후가 되면 학교 끝나기 전부터 기다리다가 건물 밖으로 나오는 아이를 맞이해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하루 두 차례 학부모들은 운동장에 모여 삼삼오오 수다를 떨며 기다린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곤욕스러웠다. 나도 삼삼이나 오오 안에 껴서 수다를 떨고 싶었지만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영국 부모들 사이에서 혼자 서 있으면 괜히 더 머쓱해졌다. 나도 (한국) 말 잘하는데... 모르는 사람과도 한 시간 안에 친해질 수 있는데... 불현듯 이곳은 미국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곧 떠날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혼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두려워도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까짓 거 영어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반 엄마들이 누군지 알게 되는 순간부터 운동장에 들어설 때면 무조건 옆에 가 붙었다. 그리고 'Hi'를 했다. 공유하는 삶이 별로 없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는 너무 빤했다. 날씨 얘기. 조금 더 나가면 학교 관련 질문들. 그나마도 엄마들이 서넛이 되어 이야기를 시작하면 도무지 그들의 대화를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그저 웃고 있는 날도 많았다. 함께 서 있기는 하되 사실은 따로였다고나 할까. 아이가 나오면 그들에게 'Bye'하고 헤어졌다. 집에 오는 길엔 늘 다짐을 했다. 부모의 원수를 갚겠노라 눈을 부릅뜨며 다짐하는 사극의 주인공처럼 전의를 불태웠다.


내 이 처참한 기분을 좌시하지 않겠노라.  
영어공부를 하자.
기필코 언젠가는 저들과 프리토킹하며 웃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집에서 학교로 나설 때면 마음속에 리스트를 정리했다. 엄마들에게 물어볼 다방면의 질문들, 대화를 열 시작의 말들을 미리 준비해 가는 거였다. 그런데 그런 것도 한두 번이지, 하루에 두 번씩 만나다 보면 말할 거리가 없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또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하이와 바이만 하고 와야지. 아니, 하이와 바이만 하더라도 얼굴 보고 웃고 와야지. 나는 지금 리스닝 공부 중이다!


만약 제삼자가 그때의 나를 봤다면 누구와 한판 붙으러 가는 줄 알았을지도 모른다. 신발을 신고 현관 옆에 달린 거울을 보며 "하이!  바이!"를 외치며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으니까. 그러고는 매우 전투적인 자세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둘째를 태운 유모차를 밀었다.


나에게 하이 바이는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존버에 맞먹는 것이었다. 내 식데로 정의를 내리자면, <하이 바이 정신>이란 새로운 나라에 정착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과 되도 않는 영어로 친해지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정성을 뜻한다. 


이 글을 읽는 어떤 이는 물을 지 모르겠다. 하이 바이 정신이 도움이 되었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움이 되긴 했다. 무안하고 머쓱한 상황도 자주 맞닥뜨리다 보면 적응이 되더라. 다른 학부모들에게도 나의 존재가 익숙해져 방과 후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거나 저녁식사 후 네댓 명이 펍에 모일 때 나를 불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내 딸의 교우관계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을까 묻는다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아이는 아이데로 친해지고 싶은 몇몇의 아이들과 친해졌고, 나는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수의 영국 엄마들 사이에 끼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마치 그것이 영국 정착 성공의 잣대라도 되는 것인 양 말이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여 입장이 바뀌면 같은 상황을 놓고 보는 시각도 손바닥 뒤집듯 바뀐다. 에든버러에서 2년을 살다가 시골마을로 이사 오고 나서 둘째 딸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전학생이 아니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였다. 그 아이가 이제 4학년이다. 역시나 친한 친구들 모두 같은 반에서 4년째 함께 공부하고 있다. 옛날에는 그렇게도 싫던 '반이 함께 올라가는 제도'가 이제는 좋아졌다. 둘째 딸과 가장 친한 두세 명은 1학년 때부터 붙어 다니던 아이들이다. 학년이 올라가도 친한 친구가 같은 반에 있다는 사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둘째 딸에게는 큰 장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얍샵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아이를 함께 입학시킨 학부모끼리는 마음을 주고받기도 쉬웠다. 굳이 하이 바이 정신을 장착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죽자 살자 달려들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서로가 서로에게 다가가 친분을 쌓았다.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함께 차를 마시고 때로는 와인을 곁들여 '엄마들의 밤' 모임을 했다. 우리 집에도 몇 번 초대해서 한국음식을 선보였다.  


지난 5년간 별의별 방법으로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노력은 했지만 여전히 언어는 내게  높은 담이다. 대화는 제법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 안에 숨겨진 문화 코드까지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대화의 반의 반만 알아 들어도 맞장구치며 대응할 수 있게 요령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나마라도 올 수 있게 된 데에는 하이 바이 정신이 밑받침이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존버가 기본적으로 버티기인 것처럼 하이 바이도 일종의 버티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을 잘 버티고 나니 무지갯빛 세상이 온 게 아니라 굳이 버티지 않았어도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에든버러에서 만났던 학부모들은 페이스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연락을 유지하는 사람이 없다. 서로에게 좋아요를 누르지도, 댓글도 달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친밀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워야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가선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아니라 친해져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연결된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5년 전 그 시절, 운동장에 홀로 서 있어도 실패한 건 아니었다. 시간의 힘을 믿고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는데 나는 그걸 몰랐다. 그래도 어쩌겠나. 시행착오는 시행해보지 않고는 겪을 수 없는 것인데. 그때의 영글음아, 되지도 않는 영어로 엄마들 속에 끼려고 노력하느라 고생 많았어. 이젠 너무 힘쓰지 않아도 돼.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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