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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Aug 30. 2019

영국 의사 앞에서 나는 배우가 된다

루푸스, 목디스크 환자의 병원 사용법

영국에서 친하게 지내는 한국 친구들 사이에서는 누가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을 때 하는 말이 있다.

 

"의사 앞에서 쓰러져! 그냥 울어버려!"


얼마나 아픈지 보여주기 위해 진료를 보는 의사 앞에서 쓰러지는 등의 과장된 행동을 하라는 뜻이다.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긴 조언이기도 하다. 우리의 아픔을 영어로 매번 완벽하게 전달하기도 쉽지 않으려니와 느린 무상 의료 시스템 때문이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고, 울기라도 하면 의사가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검사 하나라도 더 빨리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그렇지 않으면 약 처방이 끝이니까. 아프면 아플수록 배우가 되어 가는 느낌이다.


이곳에서는 아파서 의사를 만나도 돈을 내지 않는다. 아이들 예방접종도, 병원에 입원을 해도, 복잡한 수술도 공짜다. 심지어 간병인을 따로 부를 필요도 없다. 영국 전체가 NHS(National Health Service)라는 의료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영국에서는 최소한 "돈이 없어서 치료도 못 받고 죽었어요"라는 말은 듣기 힘들 것이다. 대신 "검사 기다리다가 눈이 빠져 죽을 뻔했어요"라는 말은 쉽게 들을 수 있다.


  





1993년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나는 아팠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병명을 알기 위해 이 검사, 저 검사를 해봐도 왜 아픈지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신마비와 신부전증이 나타난 후에야 루푸스라는 병명이 밝혀졌다. 면역체계에 문제가 있는 병이었다. 내 몸에 해로운 물질이 들어왔을 때 싸워야 하는 항체가 바보같이 나 자신을 항원으로 생각해 공격하는 병이었다.


죽음의 문턱을 왔다 갔다 했지만 나는 기적처럼 살아났다. 물론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 그래도 처음엔 1주일에 한 번이던 검진이 2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기간이 늘어났고 지금은 6개월에 한  번씩만 가면 될 정도로 안정이 된 상태다.


에든버러에 정착하자마자 병원을 찾아 등록했다. 거주자로 등록이 되어야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아프면 먼저 등록된 병원에 가서 지피(GP- General Practice)를 만난다. 필요에 따라 의사는 약을 처방한다. 간단한 혈액검사 정도는 동네 병원에서 가능하지만 전문의를 만난다거나 엑스레이, MRI 같은 검사는 의사가 큰 병원에 잡아줘야만 가능하다.


내 경우에는 한국과 미국에서의 의료기록을 냈기 때문에 바로 류머티즘 전문의와 연결되었다. 그 후로 이전과 마찬가지로 6개월에 한 번씩 피검사를 하고 전문의를 만나 상담을 받고 있다. 약이 떨어지면 지피가 다시 처방을 해준다. 약국에 가서 처방전만 들이밀면 무료로 약을 받을 수 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이미 무슨 병인지 판명이 났고 약이 꼭 필요한 환자가 분명했으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루푸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은 끊었지만 15년 동안 복용해야 했던 스테로이드제 때문에 서른 초반부터 골다공증이 있었다.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골밀도 검사를 예약했는데 세상에, 8개월 뒤로 잡혔다.


그 후 깨달았다. 환자가 되었을 때 필요한 건 무상 의료 시스템을 이해하는 하늘과 같은 이해심과 바다와 같은 인내심이라는 것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급 상황이라면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뼈에 구멍이 몇 개 난 것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예약된 루푸스 진료를 바꾸려면 역시 몇 개월 뒤로 밀려나곤 했다.  


마흔을 넘기며 시작된 목과 어깨 통증으로 지금까지 고생 중인 내가 지피를 수 차례 만나면서 여러 검사와 물리치료사, 관련 전문의를 만나는데 꼬박 2년이 걸렸다. 아직도 기억한다. 처음 몇 차례는 진통제만 처방하던 의사가 "통증 때문에 삶에 의욕이 없다, 죽을 것 같다"면서 내가 마음 먹고 연기를 한 날 MRI 검사를 처방했다.



에니메이션 주토피아에서 주디가 죽는 척! 하는 장면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장점이 많다. 아프면 빠른 시일 안에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좋거니와 치과나 외과처럼 손기술이 필요한 의술도 대한민국이 훨씬 앞서 간다. 예방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병을 조기에 찾아내는 확률이 높다는 것도 장점이다.


다만 한국의 질 좋은 의료 기술의 혜택을 양껏 받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감기 정도야 몇 천 원 정도로 가능하지만 가족 중에 큰 병에 걸려 장기 입원을 해야 하거나 대수술을 받아야 할 사람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경제적 조건에 따라 받을 수 있는 혜택의 범위가 달라지니까 말이다. 26년 전, 우리집에 여웃돈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은 다르게 펼쳐졌을 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건강보험 같은 건 건강할 때 미리미리 들어 두는 게 현명한 일일 수 있다. 


어느 나라건 완벽한 시스템은 없는 것 같다. 이 나라는 이게 좋은데 저건 안 좋고, 저 나라는 저건 좋은데 이게 안 좋은 식이다. 모두 다 장점과 단점이 사이좋게 손잡고 있을 뿐이다. 아픈 데 없고 건강해서 무상의료가 뭐야? 건강검진이 뭐야?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병원에 갈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테다.


그게 아니라면 각각 시스템이 갖는 장점을 누리며 적응해야지 별 수 있겠나. 한국에 가서 장기적으로 디스크 치료를 받으려면 먼저 비행기 값에 병원비를 모아야 하는 게 나의 현실이니 한동안은 영국에서 배우가 되려고 한다. 어릴 적 장래희망이 배우였는데... 연기력이 좀 돼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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