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녜 Jan 26. 2020

설마다 가족들을 미워하고 말았다

열아홉 번째 한 글자 주제, 설

올해도 어김없이 설이 돌아왔다.


한 해에 둘 뿐인 명절이긴 하지만, 설은 내가 어렸을 적 제일 좋아하던 명절이었다. 세뱃돈이라는 젯밥 탓이 가장 크긴 했지만, 명절 분위기도 꽤나 좋아했다. 어른들끼리 둘러앉아 만두를 빚고, 아이들은 오명가명 만두소를 퍼먹거나 밀가루 반죽을 떼다가 찰흙놀이처럼 사람이고 동물 등을 만들어대던 설날. 조금 몸집이 자라 어른들의 만두 빚기에 끼기 시작할 즘에도 소일거리를 돕는 일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저도 하고 싶다며 삐약거리는 어린 동생들에게 가지고 놀라며 반죽 어드메를 잘라주는 일은 뭔가 어른이 된 듯한, 그래서 권력을 가진 듯한 뿌듯함이 있었다. 등허리가 뻐근할 때쯤 몇 쟁반씩 만들어둔 만두는 냉장고로 들어갔고, 그 와중에 이 집안의 며느리 몇은 추운 베란다에서 기름 냄새를 잔뜩 머금은 채 부침개와 전을 마무리해갔다. 언젠간 나도 솜씨를 익혀 전 부치기에 동참하리, 의지를 다지던 때였다.


새벽 공기에 코끝이 차가워질 쯤엔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설핏 깨어났다. 다시 잠들었다 아빠가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나가서는 쟁반으로 음식을 몇 접시나 날라야 했다. 부엌에서 제사상으로 음식을 나르면 아빠들이 음식을 제사상 위에 배치했다. 상 차리기 후에는 절을 몇 차례씩 해댔다. 그러고는 내내 기다리던 세배 시간이었다. 차례를 기다려 세배를 하고 나면 봉투가 여럿 생겼다. 엄마에게 더 이상 맡기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을 즘엔, 혹시 소중한 봉투를 잃어버릴까 쪼르르 방에 들어가 가방이나 외투 속에 숨겨두곤 했다. 올해의 수확은 얼마일지 궁금했지만 괜히 눈치가 보여 내용물은 집에 안전히 돌아가서야 숨어서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온전한 ‘어른’으로서의 대접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수확의 즐거움보다는 노동의 괴로움이 커져만 갔다. 노동의 괴로움은 노동의 그 자체보다는 불공평하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여자의 머릿수가 더 많은 이 집에서 왜 여자들은 더 작은 상에, 그것도 뒤늦게서야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 나는 내 엄마가 가엾고 내 엄마가 덜 고생했으면 좋겠어서 두 팔 걷어붙이고 소일거리를 돕고 있는데, 본인 엄마가 가여워서, 본인 엄마가 원하셔서 효도 차원에서 제사를 계속하자던 저 어른들은 어떻게 텔레비전 앞에서 편안할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푸념을 늘어놓는 엄마는 왜 이 노동을 계속하는 걸까.


이런 궁금증과 답답함과 짜증 사이에서 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바로 미움을 계속 발견하고 마는 나 자신이었다. 사실 매해 상황이 나아지고 있음에도 마음에는 미움이 가득했다. 제사도 줄고 내려가는 시간도 늦어졌지만 그래도 나는 진절머리 치고 있었다. 엄마에게 동의 없이 고향 친구들과 부부동반 약속을 잡아버리는 아빠가 미웠다. 결혼하지 말고 돈 많이 벌어 쓸 데 없는 그 돈 자기 아이들 장난감이나 사주라는 사촌오빠 염치에 어이가 없었다. 부엌일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남자들이 싫었다. 일을 돕는 내게 시집만 가면 되겠다는 어른들이 짜증 났다.


어느 해 명절에는 큰소리도 내봤다. 시집갈 때 다 됐다는 이야기엔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 누가 시키면 하기 싫은 심보 모르냐며, 한번 더 얘기하면 시집 안 간다는 으름장을 놨다. 오빠들을 쫓아다니며 빨리 이거 저거 나르라는 호령을 했다. 누워있는 아빠들을 앉히고 밤이라도 깎고 만두라도 빚으라고 졸랐다. 하지만 그럴 때면 너 정말 시집 안 갈 거냐며 쟤가 어쩌려고 저러냐는 핀잔소리와, 자기가 한다며 아픈 허리를 짚고 일어서시는 할머니와, 그냥 들어가서 쉬라는 엄마의 한숨 섞인 말만 더해질 뿐이었다.


일 년에 두 번뿐인 만남이라는데, 그러니 음식도 하고 먼 길도 가보고 좋은 얘기도 하자는데, 과연 그래서 이 친척들 사이는 더 좋아졌을까. 내 마음은 점차 멀어져만 가는 것 같은데, 이렇게 만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친척이라는 게 뭐길래 의무적으로라도 만남을 이어가야 하는 걸까. 새해에는 즐거운 일만, 행복한 일만 가득하라는 세배 사이 오고 가는 덕담 속에서도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스로가 괴로웠다.



괴로워하면서도 이 시간을 꾸역꾸역 버텨가는 내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설 몇 주 전부터 길게 연휴라며 좋아하는 동료들 앞에서도 한숨을 푹푹 쉬던 나는 왜 큰 댁에 따라갔을까. 엄마 고생할게 싫어서 손이라도 하나 더 더하려고, 그리고 누구라도 나서서 미운 소리라도 한 번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라는 정의의 사도 같은 마음이 있었지만 정말 그게 효과가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누가 뭐래도 내게는 먼 친척보다는 가깝고 마음 맞는 이웃이 훨씬 소중하다. 내 가치관에 동의는 하지 않더라도 배려는 해주는 우리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면 시간을 쏟는 게 아깝다. 이렇게 소중한 연휴를 더 이상 미움 가득한 마음으로만 보내고 싶지 않다. 아무래도 다음 명절은, 안 미워할 수 있는 사람들과 보내야 할 때인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맞는 벗들에게 감사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