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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12. 2022

여름 휴가 단상

1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이렇게 살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루에도 열두 번씩 고민하던 나에게 쉼이 필요했다. 때마침 여름휴가. 이번 기회에 버릴 건 버리고 담을 것만 담겠다는 마음으로 양양 낙산사로 떠났다. 안녕, 나 템플스테이 하러 간다.


2

이틀을 계획했는데 아쉬움에 하루를 더해 3일을 머물렀다. 자연과 어우러진 그곳이 좋았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큰 불상과 어우러져 해 질 녘 노을 지는 바다의 모습은, 세상 그 어떤 풍경도 견줄 수 없이 감탄을 자아냈다.


아 황홀해.. 해지는 광경에 넋을 빼앗긴 채 한참을 앉아있다 보면 해가 져 어둑해졌다.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와 그날의 일상을 끄적이며 마무리하던 하루.


3

편한 개량 한복 차림도 좋았고, 바람에 살랑살랑 풍경소리도 좋았고, 몸 조아려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의 겸손한 모습도 좋았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지 가만 들여다보고 상상하는 것도 좋았고, 무엇하나 급할 것 없이 차분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좋았다. 핸드폰 반납하고 오로지 나에게 몰입하여 책을 보고 사색하는 그 시간. 이게 힐링인 건가 하며 맘껏 쉼을 누렸다.  


4

스님과 참가자 여러 명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눴다.

"왜 스님이 되셨어요?"

나의 질문에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스님한테는 과거 묻는 거 아니라던데."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그런가요.

이어 라면 먹어가며 온갖 명품을 탐했다던 스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흥미로웠다. 멀끔하게 생긴 스님 얼굴 위로 문득 잘생긴 남자 배우가 겹쳐 보였고, ‘속세에서 이 스님, 여자 꽤나 울렸겠는 걸.’ 싶은 생각이 슬쩍 들다가! 자기 안에 차오르는 욕망을 내어놓고 스님이 되기까지 그 사람이 겪었을 고뇌와 번민이 뭉클 다가왔다. 스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당신의 삶이 평온하기를 바라요.


5

내가 머물던 때, 자주 마주치던 모자가 있었다. 20살 된 지적장애 아들과 그의 엄마. 아들은 종종 돌발 행동을 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살갑게 인사하며 아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엄마는 선한 얼굴의 정석이라고나 할까, 참 예쁘고도 선한 모습이었다. 항상 웃으며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인사했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낳아 기르는 삶이 그리 만만치 않았겠지. 그 예쁜 웃음과 이어지는 인사, 그 따스한 친절 뒤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었을까. 그 엄마의 모습이 오래 기억된다.


6

하루 일과 중 꼭 참여해야 하는 것은 하루에 3번 공양드리기, 울력(대중들이 함께하는 육체적 노동) 참여하기였다. 이것 외에는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울력 시간에는 잡초를 뽑았다. 절과 기둥 틈 사이에 자라나 있는 잡초를 발견하고 뽑는 희열이란, 잡초뽑기가 이렇게 재밌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모든 것이 자유로운 일상에서 어떤 일이든 노동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일상에 활력을 주는구나 깨달았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는 말이 있던가. 일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열심히 일하고 많이 먹었다.


7

하루 세끼 건강한 식단 잘도 먹었다. 고기 하나 없이 이렇게나 밥이 맛있다고? 나 비건으로도 살 수 있겠는걸? 채식 위주의 식단에 감탄하며 싹싹 비우며 공양을 드리던 차, 마지막 날에 아뿔싸! 삼겹살에 소주 한잔이 문득 떠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고 템플스테이 마지막 날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고 싶은 마음 외에는 모든 것이 완벽한 스테이였다.


8

그곳에서 나는 오랜 고민의 마침표를 찍었다. 뭐, 이미 결말은 다 났는데, 어디서 마지막 점 하나를 찍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차였다. 회사로 돌아가면 시원하게 사직서를 낼 것이야 음하하.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드냐고 불평할 게 아니었다. 힘들면 그 힘든 세상에서 발 빼면 그만이었다. 경쟁이 가득한 곳, 누군가를 밟아서야 나아갈 수 있는 곳,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오래 고민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을 테야.


9

템플스테이가 끝나고 경포대에 모여있는 친구들 무리에 조인했다. 경포대 밤바다에서 한 여름밤의 낭만 뭐 그런 것을 기대했을 아이들은 한껏 치장을 하고 나타났고, 배낭객 차림의 나를 보고 어이없어하며 놀려댔다. 너희들이 즐겁다면 기꺼이 놀림감이 되어주마.


한 맥주 회사에서 주최한 페스티벌이 열렸고 흥에 취해 신나게 뛰어놀았다. 밤이 되자 더 나은 이성을 찾고자 하이에나처럼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그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남성 무리와 경포대 밤바다 앞에 둘러앉아 소위 말하는 헌팅 만남을 했다.


10

마음에 드는 이성 앞에서 돌변하는 친구의 태도를 보며,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고자 장난인 듯? 장난 아닌 누군가를 깔아내리는 언행이 난무하는 그곳에서, 그 미묘한 자극과 기류와 감정이 오고 가는 곳에서, ‘아! 나 속세에 와 있구나.’ 정신이 바짝 차려졌다. 아, 이런 긴장감 너무 피곤하다. 편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누구의 눈치 보지 않고, 잡초 뜯고, 공양드리고 책 읽고 자연에 흠뻑 취해있던 그때의 내가 불쑥 그리워졌다. 그래도! 뭐 술 한잔 하며, 이런저런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 하며, 그렇게 한여름 날의 추억도 나쁘지 않다.


11

여름휴가에서 돌아온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냈다. 동료들에게 행복을 찾아 떠난다는 어쭙잖은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그 후 돌고돌아 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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