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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12. 2022

안방 앞을 서성이던 아이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집에 간 나는 거실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안방에서 엄마의 통화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곧이어 ‘윤슬이는~’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순간적으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나는 티브이 볼륨을 줄일까? 높일까? 여러 번 고민하다 결국 엄마의 목소리를 담담히 받아냈다.


유년시절, 나는 엄마의 전화 통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엄마는 주로 친척 혹은 친구와 통화를 했는데 그럴 때면 아빠를 포함한 나와 동생,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잦았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낌새가 느껴질 때면, 무슨 이야기를 하나, 혹시 나에 대해 험담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 반 설렘 반의 감정으로 문이 닫힌 안방 앞을 기웃거렸다. 귀를 쫑긋하고 엄마의 전화소리에 귀 기울이다, 내가 받은 상이나, 내가 반장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때면 그제야 ‘엄마가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있구나’ 하며 안도하던 내가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꾸준히 상을 받아오던 아이였다. 1학년 때는 줄곧 받아쓰기 100점을 받았고, 1-2개라도 틀린 날에는 그 누구보다 아쉬움을 토로하던 적극성 많은 아이였다. 체육을 제외한 미술, 음악, 다른 과목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받는 아이였고, 그런 칭찬을 발판 삼아 학급 임원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건 엄마의 반응이었다.


엄마는 딸을 마주 보고 직접적으로 해야 할 표현과 반응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수다로 풀어냈다.

‘우리 딸이 상을 받았대.’ 곧이어 이어지는 말들.

‘에이, 뭐 그 정도는 아니야. 다 그 정도는 하는 거지.’

당당하게 나를 치켜세우며 자랑하는 것도 아닌, 겸손의 태도도 아닌, 이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얽히고설킨 엄마의 말들을 들으며 나는 엄마에게서 받아야 할 인정을 채웠다. 마음이 어떠한지, 어떤 이유로 기쁜지, 어떤 이유로 서운한지 표현하지 않는 엄마 앞에서 나는 그저 어렴풋이 헤아려가며, 눈치껏 엄마와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며 성장해야 했다.


훗날, 성인이 되어 참여한 심리 워크숍에서 어린 시절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을 그려보는 시간이 있었다. 다양한 선물을 떠올렸지만 그중 하나를 그렸는데, 학교에서 받아온 나의 상장 앞에서 따봉을 하며 함박웃음 짓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로부터 받는 충분한 인정, 지지, 칭찬, 격려 뭐 그런 것들이 고팠었구나 처음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 후 나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나의 주된 감정, 공허의 밑바닥에는 양육자와의 정서적 교류의 부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이다. 가족에 대한 자극이 있을 때면 가족 당사자와 대화를 하고 표현하기보다, 전화기를 붙잡고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야기한다. 그런 엄마의 행동을 보면서, 표현을 주고받는 것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엄마의 어린아이가 보이는 듯 해,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이 생긴다. 이제는 다 큰 내가 먼저 손 내밀어 볼까 생각하지만 매번 어렵다.


엄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나 마음 졸이며 안방 앞을 서성이던 어린아이는 서른이 넘어 많은 것을 알아가고 있다. 엄마의 행동으로 채우지 못한 나의 정서적 결핍을 바라보며 슬퍼하고 다독이던 시간을 지나, 더 이상 엄마의 언행으로 상처받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더 나아가 엄마를 품어보겠다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 정도 크느라고 수고했다. 앞으로 잘 커나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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