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을 했다. 상대는 30대 후반의 회사원. 무교라는 이야기에 소개받는 것에 고민이 있었지만 그래도 만나보자 하는 마음으로 약속을 잡았다.
난 무얼 기대했던 걸까. 첫 만남에 어? 느낌이 괜찮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톤 앤 매너를 갖추고, 진중한 분위기를 풍기고, 오고 가는 대화에서 통한다는 느낌을 받고, 자신만의 중심이 있으며, 내가 가진 종교를 충분히 존중하며,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믿음을 갖고자 하는 의지를 내어주는 사람, 서른 넘어 시작하는 나의 공부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 그러면서 나도 그가 멋져 보이고 그 역시 나를 예쁘게 보는 낭만적인 만남을 기대했다.
아니, 꿈꿨다.
실제로 만난 그는 진중함보다는 가벼움에 가까웠다. 목소리가 컸는데 그 덕에 슬며시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았다. 스스로 철이 덜 들었으며, 오랜 시간 공부하여 대기업에 갔지만 아직도 자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이야기했다. 재테크하고 월급 빠르게 모아 파이어족 되는 것이 목표이며, 이제껏 연애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누군가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어 소개팅에 나왔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렇게 우리는 두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이렇다 할 느낌도, 호기심도 없었다. 우리 사이에 연락은 오고 가지 않았고 그렇게 소개팅은 끝이 났다. 허무했다. 20대 때는 연애가 참 쉬웠던 것 같은데 이제는 누구 만나는 게 왜 이리 어렵지? ‘나이 들수록 연애가 어렵다’는 뻔한 말을 그저 흘려들었는데, 요즘에 그 말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다. 허탈했다.
나,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을까?
과거, 소위 말하는 나는 금사빠였다. 누군가의 장점을 잘 보는 덕에 상대를 쉽게 미화했다. 열렬히 연애하다 더 이상 내가 원하는 애정과 관심이 오지 않으면 헤어짐을 선택했다. 이별 앞에서는 괴로워 어쩔 줄 몰랐다. 괴로운 마음에 허덕이다 보면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고 그렇게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얼 원하는지 몰랐다. 그저 애정과 관심에 굶주려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이성이 있으면 그와 쉽게 만남을 가졌다. 그렇게 인정을 갈구하고 사랑을 채우기 바쁜 이십 대를 보냈다.
더 일찍, 나 스스로 온전해질 수 있었다면 그런 후에 누군가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겪었던 그 연애 경험들이 나 스스로 온전해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는 점이다. 세상에 혼자 내버려진 것 같은 고통 앞에서 허덕이고, 누군가와 깊은 감정 교류를 하며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대의 모습을 알게 되고, 누군가와 깊게 맺었던 관계들이 나를 이해하고 나를 성장시키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내 삶에도 이런저런 변화가 생겼다. 내 삶을 관통하는 신앙이 생겼고, ‘사랑’에 관한 새로운 정의가 생겼다. 내가 중요시하는 가치관이 선명해졌으며, 꿈꾸는 미래의 모습도 그려진다. 금사빠였던 과거의 나는 사라졌고,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감정도 두 번 보고, 세 번 보는 신중함마저 생겼다.
그리고 서른 초반이 된 지금, 누군가를 만나 믿음 안에서 사랑의 가정을 꿈꾸지만 누군가를 만나는 현실 앞에서 낙담한다. 당분간은 실망스러운 이 마음을 잘 다독이며 다른 생각 않고 내 앞에 주어진 일상에 집중하자 마음먹는다. 기도하고, 공부하고, 운동하는 일상. 일상을 단단히 채워 힘을 길러야지. 언젠가 내 삶에 찾아올 상대를 위하여 더 단단한 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