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사랑
여자의 비명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이 소동에 신여사는 사색이 되어 방으로 들어왔고 사태를 간파하고 넋이 나간 듯 앉아있는 여자의 어깨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이렇게 끝이 날 줄 알았어.”
이윽고 응급구조대가 들어와 남자를 실어냈다. 여자는 경찰에게 끌려 나갔다. 나춘희 씨가 진저리를 치며 피를 닦아내었다. 나춘희 씨는 걸레를 들고 이리저리 닦다가 피 세례로 온통 붉게 물들어있는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가만 보니 끔찍한 것은 네가 다 보았겠구나?"
아름다운 순애보가 여관에서 이루어지지 못할 법도 없다. 한 연인이 그랬다. 그들은 사랑하는데도 결혼하지 못한 아픈 사연을 지니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이 방에 들어오는 연인이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절절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보지 못해서 슬프고 보기 싫은데도 보아야 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슬프다는 원리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들 연인은 거의 매 달 한 번씩 여기서 만났다. 그들이 굳이 왜 이 방을 고집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신여사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 않다면 이미 들어온 손님의 숙박료를 환불해 주면서까지 굳이 그들에게 이 방을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 방에서 첫날밤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결혼을 하여 보내는 초야가 아니라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기 전에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그들이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남자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고 여자의 집은 가난한 것을 경멸하는 지극히 통속적인 집안이었다.
“그냥 죽자. 함께.”
여자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표정은 비장했다.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얼굴은 웃는 듯 우는 듯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욱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들은 서로를 응시하였다. 그러다가 남자가 말했다.
“아냐, 내가 잘못했어. 난 자신이 없어. 죽을 수 싫어.”
“그럼 어쩌자는 거예요?”
“어쨌든 그런 식이 되어선 안 돼.”
“이젠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어요. 내일이 내 결혼식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여기서 첫날밤을 보내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내일 각자의 집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는 거지요.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남자는 여자의 이 말에 고무된 듯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여자는 남자의 허리에 양손을 감고 눈을 감았다. 남자의 입술이 여자의 입술을 포갰고 여자가 남자의 목을 부둥켜안았다. 그러나 그들의 첫날밤은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들은 결혼하여 함께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상대와 결혼한 후 이 방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이 방에서 결혼한 것처럼 아니, 부부 이상의 애틋한 사랑을 확인하며 세월을 보냈다.
“당신이라는 여자는 변함이 없어. 그래서 가끔은 지겹기도 해.”
남자의 말에 여자가 눈을 흘기며 남자의 손등을 손으로 건드리듯 스쳤다. 남자가 물었다.
“당신은 내게 거짓말한 게 있어?”
여자가 말했다.
“물론 있어요.”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나는 남자와 여자의 실상을 알고 있다. 이들은 상대방을 위해 오래전부터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이 방에 혼자 묵은 적이 있었다. 당시 남자는 아내와 이혼 수속을 밟고 있었다. 남자의 아내는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왔고 남자는 그래, 그래, 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 하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자 수화기 속의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어. 당신이 날 속이고 있다는 거.”
남자는 부인하지 않았다.
“미안해.”
남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화기 속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안하다고 하면 다야? 좋아. 끝까지 선량한 척만 하시겠다는 거지? 좋아. 난 당신을 가난뱅이로 만들어주겠어. 아이도 돈도 모두 빼앗아 버릴 거야. 당신의 직장생활도 이젠 끝이야. 난 당신이 오랫동안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걸 학교에 다 말해 버릴 거니까. 그럼 당신의 위선이 다 드러나겠지?”
“그렇게 할 필요 없어. 이미 난 사직서를 냈어.”
“그럼 당신은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는 거야. 그 지경이 돼도 좋을 만큼 그 여자가 당신에게 소중한 거야?”
“난 좀 제대로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처럼 살고 싶을 뿐이야.”
“난 당신이 그 여자와 산다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아이를 앞세워서라도 당신이 그 여자와 살도록 하진 않겠어.”
“그럼 서로가 불행해져.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렸어. 이제 좀 현명해질 필요가 있어.”
남자는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며칠 동안 잠만 잤다. 그런 남자에게서 불길한 예감을 읽었던 것일까, 신여사는 자주 인터폰으로 남자의 안부를 확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아내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는 첫사랑 여자와 다시 이 방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