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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백설장 15화

백설장 15

- 변심한 연인

by 이도원

나는 이 방에서 수 천 수 만 명의 연인을 보았다. 장사가 잘 되었을 때는 오후 한 두 시부터 자정까지 최하 두 쌍은 들어왔으니 네 명에다가 숙박하는 한 쌍을 합하면 여섯 명, 한 달이면 180명, 일 년이면 2160명, 그러니까 40년이면 86,400명이 된다. 물론 장사가 안 되기 시작한 십 년을 뺀다 해도 64,800명이 된다. 그리고 그 횟수만큼 몇 번이나 박살이 날 뻔하였다. 그때마다 희한하게 맥주병이나 칼, 여자의 핸드백 같은 것이 나를 비껴 날아가곤 하였다. 이 방에서 일어났던 가장 기막히고 끔찍했던 일은 바로 살인사건이었다.


가끔 신여사는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진저리치곤 하였다. 러브스토리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여관이라는 공간에선 치정으로 인한 사건이 전부였다. 너무 사랑하거나 너무 미워하거나 너무 믿었거나 믿지 않았거나 소유하고 싶었거나 자유롭고 싶었거나 모두 무상함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전부였다. 쾌락은 만족을 몰라 끊임없이 욕망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지만 결국 그 끝은 추락뿐이었다.

모텔 주변은 늘 이런 일들로 시끄러웠다. 하루는 베네치아에서 하루는 리젠시에서 , 하루는 러브스토리로 돌아가며 일어났다. 그중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 곳이 장사가 잘 되는 러브스토리였다.

어느 날 나춘희 씨가 러브스토리에 투숙한 손님이 변사체로 발견되어 경찰차와 구급차가 주차장에 출동한 것을 보고 바람처럼 달려와 신여사에게 말을 날랐다.

“말도 말아요. 근처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 구경을 온 것 같아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수군대고 있는지. 침대 위에 50대 남자가 죽어 있었다는데 근데 남자의 사인이 좀 그래요. 심장마비로 즉사했다고 해요. 청소를 하러 간 여자가 들어갔더니 함께 들어온 여자는 없고 남자만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있다고 말하더라고요. 여사장에게 경찰은 함께 투숙한 여자의 인상착의를 캐묻는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어요? 사모님은 예외지만요. 그렇죠?”

“나도 이젠 기억이 잘 안나. 손님들을 어떻게 다 기억할 수 있겠어? 더구나 여관에 들어오는 여자들은 좀처럼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하니 더더욱 기억하기가 어렵지. 근데 왜 여자가 달아났을까? 부적절한 관계여서 그렇긴 하겠지만 그래도 함께 들어온 처지에 혼자만 달아나면 어떡하나. 병원에라도 데리고 갔어야지. 어째 사람들이 갈수록 이렇게 비정해지는지 모르겠어.”

“아마 내 생각엔 그걸 너무 심하게 해서 남자가 심장마비가 걸린 것 같아요. 생각 좀 해보세요. 남자가 위에서 갑자기 힘없이 축 늘어지면 깔린 여자가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이미 남자는 죽었고 만약 신고를 하게 되면 일이 커져 자신의 간통이 천하에 다 드러나게 되는데. 나 같아도 도망갈 것 같아요.”

“그래도 그렇지. 서로 사랑해서 그렇게 들어왔을 텐데. 쯧쯧.”


그 사건이 있고 난 뒤였다. 드디어 백설장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한 여자와 남자는 심하게 싸웠다. 여자는 당신 때문에 남편이 이제 알게 되었으니 책임지라고 윽박질렀고 남자는 나도 마찬가지야. 아내도, 회사사람도 다 알게 되었으니 피장파장이야,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줄곧 돈 이야기만 했다. 여자는 자신이 빌려준 돈을 내놓으라고 했고 남자는 내가 언제 돈을 빌려 달랬어? 네가 그냥 해 준거지. 정말 치사하군, 하며 여자를 벌레 보듯 바라보았다.

여자는 당신을 영원히 이 사회에서 매장시켜 버릴 거야. 지구 끝까지 따라가며 괴롭힐 거야, 하며 독이 오른 뱀처럼 울부짖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남자는 그런 여자의 목에 손을 갖다 댔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죽여라. 죽여.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네가 날 죽이지 못하면 내가 널 죽여줄 테야, 하고 울부짖었다. 남자는 여자의 목을 조르다가 힘없이 놓아버리길 대여섯 번은 넘게 하더니 힘없이 뒤로 물러나 앉았다. 그리고는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다.

“더 이상 이렇게 끌어봤자 너나 나나 좋을 게 없어. 여기서 그만 끝내자. 넌 가정으로 돌아가. 남편에게 용서를 빌어. 나도 이제 내 가정에 충실할 테니.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가보다.”

남자가 옷을 입고 나가려고 했다. 여자는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여자에게서 살기가 느껴졌다. 이 방을 드나든 수많은 여자들 가운데 그런 눈빛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천장을 보거나 나를 바라보던 여자들. 때로 여자는 상대 남자가 잠이 든 사이 분을 못 견뎌 나를 향해 베개를 던지기도 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나면 여지없이 냉담해지는 남자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돈을 바라거나 욕망을 채우려는 여자들이 아닌, 자신의 존재가 살아있다는 것을 검증이라도 하기 위해 들어온 여자들의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갑자기 여자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남자가 테이블에 올려 둔 열쇠꾸러미를 들었다.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왜 이래?”

"어차피 내가 사준 거야. 이제 헤어질 마당에 무슨 짓을 못하겠어."

"그래서 지금 그 차를 타고 가시겠다. 이거 치사해서 원."

남자는 혀를 차며 여자의 어깨를 감쌌다. 그때였다. 여자가 들고 있던 열쇠로 남자의 얼굴을 갈겼다. '아이코.' 하는 비명과 함께 남자가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여자는 그래놓고 겁이 났는지 열쇠를 들고 문 쪽으로 달아났다. 남자는 현관에 발을 내밀고 있던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미친년. 신세 망친 건 너뿐만이 아냐. 너 때문에 일이 이렇게 커져 버린 거라고. 근데 이제 와서 나를 원망하는 거야?"

남자는 여자의 뺨을 여러 번 갈겼다. 그리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발로 웅크린 여자의 등을 지근지근 밟았다.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남자는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어느새 여자의 손엔 맥주병이 들려있었다. 여자는 맥주병을 위로 높이 쳐들었고 담배를 입에 무는 남자의 뒤통수를 겨냥해 내리쳤다. 병이 깨지며 거품과 함께 피를 뿌렸다. 여자의 손에서도 남자의 머리에서도 진한 피 냄새와 함께 붉은 피가 펑펑 뿜어져 나왔다. 남자는 방바닥으로 고꾸라져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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