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은 사랑에 방해가 돼
오늘따라 웬일인지 손님이 줄을 잇고 들어온다. 또 다른 남녀가 들어온다. 목사가 한 시간 넘게 기도를 하고 난 뒤라 그럴까 방 안은 다른 어느 때보다 경건하고 엄숙하게 느껴졌다. 목사의 통절한 기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 다시는 여자를 데리고 여관에 들어오는 무모한 모험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 예상과 달리 엄숙한 방의 분위기를 단번에 희석시키듯 이들 낯익은 남자와 여자는 마치 제 집으로 들어오듯 익숙하게 옷을 벗는다. 남자가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간다. 여자는 옷을 입은 채로 내 쪽으로 다가와 도전적인 자세로 내 앞에 선다. 여자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끌러 두 개의 사기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젖가슴을 내보이고 있다. 여자의 가슴은 탄력적이며 풍만하다. 그러나 그 가슴을 떠받치고 있는 작은 얼굴은 근심으로 가득하다. 여자는 블라우스를 헤집고 연신 자신의 젖가슴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린다. 양손을 아래에 받치고는 보물 찾기를 하듯 섬세하게 만지다가 나중엔 두 개의 젖꼭지를 번갈아가며 비틀고 비빈다. 여자의 표정은 어둡고 절망적이어서 그 행위가 성적인 쾌락을 위한 모종의 동작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욕실로 들어갔던 남자가 나온다. 여자는 허겁지겁 블라우스 단추를 채우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남자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슬쩍 여자를 곁눈질한다.
“왜 그래 오늘? 조금 전 식당에서도 뭐 씹은 얼굴이더니.”
여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남자는 벗은 몸으로 내 앞에서 이제 머리를 빗고 있다. 꾸준한 운동과 관리로 잘 다져진 멋진 근육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내 앞을 떠날 줄을 모른다. 자기도취에 빠진 남자는 한참 동안 자신의 몸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담배가 생각난 듯 방안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한다.
“이거 참 큰일이네. 담배가 없네.”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너도 한번 찾아봐. 혹시 피우고 남은 게 있는지.”
여자는 귀찮은 듯 건성으로 슬쩍 가방 안을 보더니 이내 남자 쪽을 보며 퉁명스레 말한다.
“없어.”
“잘 찾아보지도 않고서.”
“내가 없다면 없는 줄 알아.”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여자 쪽으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여자의 핸드백을 열어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한다.
“여기 있네. 왜 안 하던 거짓말을 하고 그래?”
남자는 여자의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입으로 가져가려고 한다. 그때 여자가 남자의 입술에 문 담배를 손으로 뽑았다.
“왜 이러는 거야?”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
“직접 사서 피워. 그리고 그렇게 벗은 채로 내 앞에 다니지 마. 흉해 죽겠어.”
“오늘따라 왜 이래? 언제는 내 근육질 몸이 좋다고 환장이었으면서. 여자의 변덕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여자는 입술을 꼭 깨문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옷을 입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어디 가려고?”
“담배 사려고 간다. 왜?”
남자의 볼멘 목소리에 어이가 없다는 듯 여자는 한동안 말없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하룻밤 담배 안 피운다고 어디 죽어? 오늘만 좀 참아.”
“그러니까 네 담배 좀 달라는 거 아냐?”
그러자 여자가 거칠게 담뱃갑을 던진다.
“자, 여기 실컷 피우고 죽어버려.”
“담배 하나 주면서 살벌하네.”
여자는 내 쪽을 향해 한숨을 내쉰다. 남자가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 내뿜는 순간, 담배연기가 여자의 얼굴을 뒤덮는다. 남자는 담배 때문인지 한결 은근한 목소리가 되어 여자에게 묻는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그러자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당신 나 사랑해?”
여자가 뜬금없이 말하자 당황한 듯 남자의 표정이 변한다. 남자는 재떨이에 재를 떨며 말한다.
“그럼. 사랑하지 않으면 이렇게 오래도록 만나겠어? 벌써 1년이 넘었잖아.”
“사랑한다는 말, 정말이지?”
“그럼 정말이지.”
“내가 무슨 병에 걸려도 그럴 거지?”
여자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온다.
“엉뚱하게 왜 그래? 오늘따라 정말 이상한데. 당연하지. 병에 걸리면 더 사랑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 … 그렇지 … 언젠가 당신이 이런 말을 했었지? 네가 암에라도 걸렸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살릴 기회라도 생기지, 하고 말이야. 기억나?”
“그럼 기억나지.”
“맞아. 당신은 그런 사람이지. 나 없인 못 사는 사람이지.”
“어서 말해. 빙빙 돌리지 말고. 설마 날 시험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여자는 그래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엔 정적이 흐른다. 남자의 담배연기만 방안을 가득 메운다. 이윽고 결심한 듯 여자가 말한다.
“나 … 암이야. 유방암 이래. 한쪽 유방을 잘라내야 한대.”
여자의 목소리는 침착함을 가장한 듯 흔들리고 있다.
일순 남자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표정을 불안하게 올려다보고 있다.
“한쪽에만 생긴 거래. 다행이지 안 그래? 의사도 그렇게 말했어. 나머지 한쪽은 이상 없다고. 당신 근데 왜 표정이 그래? 괜찮다고 했잖아.”
여자는 이제 더 이상 평정심을 연기할 수가 없는 것일까, 애원하듯 남자에게 매달린다. 남자는 겨우 담배를 입에서 떼고 말한다.
“그럼 괜찮지.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
그러자 여자가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말한다.
“당신,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당신은 멋진 남자야.”
여자는 남자에게 키스를 퍼붓고 한 손으론 남자의 성기를 더듬는다. 그러자 남자가 무엇에 덴 듯 황급히 여자의 몸에서 떨어진다.
“이거 왜 이래?”
여자 또한 불에 덴 듯 남자의 몸에서 입술과 손을 뗀다. 남자의 반응에 당황한 표정이다. 남자는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간다.
“아니, 네 몸을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 수술해야 한다며? …그럼 무리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어?”
여자의 입술이 묘하게 뒤틀어진다.
“좀 솔직해지시지. 병에 걸린 여자는 재수 없다고. 아예 헤어지자고 말하는 게 나아. 그런 거짓말보다는.”
남자는 여자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그러나 남자의 입술은 납으로 봉한 듯 떨어질 줄 모른다.
“허무해. 그리고 억울해. 암에 걸린 것보다 당신의 배신이 더 큰 고통이야 … 당신, 지옥에 떨어질 거야.”
이제 여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앉는다. 남자는 여자가 그렇든 말든 상관없이 담배를 깊게 빨아댄다.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의 끝이 바로 이런 것이다. 남자는 섹스 보다 더 위험한 것이 바로 교감이라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 남자는 남자와의 성경험이 없는 여자와 결혼할 계획이었고 그 순결한 신부를 만족시키기 위해선 노련한 여자와 성적 테크닉을 연습했어야 했다. 창녀보다는 위생적으로 덜 위험하고, 성적으로 무지한 신부보다는 원숙한 여자에게서 쾌락의 테크닉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남자에게 아름다운 몸매와 훌륭한 섹스의 매너를 가진 이 여자는 이런 용도에 안성맞춤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질병을 끝까지 속였어야 했다. 한쪽 유방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남자의 비정한 진심 따위는 몰랐어도 좋았다. 한쪽의 배우자가 죽어야 지루한 부부관계가 종료되는 게임과도 같은 현재의 부부관계와 마찬가지로 이들 연인 또한 한쪽이 질병이 들고서야 게임이 종료가 되는 것이다.
방 안은 담배연기와 두 사람의 침묵으로 어느새 가득 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