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청년과 노년, 그 사이 어딘가

by 손이한

39살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안경을 맞추는 것이었다. 몇 달 전부터 눈앞에 거무스레한 것이 떠다니는 게 늘어나더니 조금만 멀리 있는 것도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망막박리 전조 증상이면 큰일이다 싶어서 병원에 검진을 했더니, 부유물이 보이는 건 라식을 했던 사람들의 흔한 증상이며 이제 곧 노안이 시작될 나이이니 시력 교정술도 무리라고 했다. 건강이 의심되어 병원을 찾아갔더니 나의 노화만 확인사살 당하고 말았다.


"저희 엄마가 그러는데, 여자는 손이 제일 중요하대요. 여자가 손이 거칠면 안 된다고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중학생 제자가 내게 선물로 핸드크림을 주며 했던 말이 요즘 자꾸 떠오른다. 그 아이의 어머니도 차츰 탄력을 잃어가고 주름이 잡히는 손을 보며 핸드크림이 중요하다고 아이 앞에서 연신 강조를 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는 그 제자 어머니의 나이 언저리에 왔고, 손등의 잔주름은 내가 더 이상 청년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었다. 10년 전에는 자주 바르지 않았던 핸드크림을 챙겨 바르기 시작한 것도 작년부터였다.


어디 손등뿐이겠는가. 30대 초반, 화장실 거울을 보다가 정수리에 솟아난 흰머리 한가닥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카락을 들추다가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을 발견하면 아직은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핀셋으로 쑥 뽑아버릴 정도로 무덤덤해졌다. 바람이 불면 눈이 시리고 조금만 운동을 하지 않아도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나이. 내년이면 앞에 '4'를 다는 마지막 30대에, 나는 내가 중년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중년이란 어떤 단계일까. 청년까지의 삶은 익숙했지만 중년으로서의 삶은 처음이다.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았다면 자녀의 양육과 교육에 매진을 하는 시기이겠지만, 미혼 1인 가구는 어떤 삶의 목표를 지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연애 사업에 매진하여 결혼을 하겠다는 일념도 희미해져 나와 너가 아닌, 나 개인으로서의 삶의 목표를 새롭게 세워야만 했다. 청년이라고 하기엔 성숙하고 노년이라고 하기엔 미숙한 이 애매한 시기. 나는 제2의 사춘기를 겪고 있었다.




2학기가 되고 내 옆 자리엔 새로운 사람이 왔다. 작년에 퇴직을 하신 선생님이신데, 2학기에 갑작스럽게 공석이 생기자 학교 측에서 무리하게 부탁드려 오신 분이었다. 나와는 3년 전 다른 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선배님이었고, 좋은 기억만 있던 것은 아니라 긴장되면서도 아예 모르는 사람이 오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3년 만에 뵈어서 그런 것일까. 단호하고 냉정한 말투에 언제나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던 선배님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세월이 흐른 탓이라 여겼지만 몇 달의 시간을 두고 보니 달라진 것은 인상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깊은 삶의 통찰이 묻어났다. 치매에 걸린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 보니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녀와 도란도란 대화를 하다 보면 내 생각과 감정도 깊고 풍요로워지는 것 같았다. 인간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내 신념도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많이 허물어졌다. 단계를 더해가며 우려낼 때마다 맛의 깊이가 달라지는 차(茶)처럼 그녀에게서도 은근한 풍미가 느껴졌다. 막연하게 그려오던 이상적인 중년 어른의 모습을 그녀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를 보며 나는 멋진 어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나도 그녀처럼 은은한 향을 간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청년들의 미숙함을 보더라도 채근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사람. 나의 신념과 소신이 있더라도 내세우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말에 더 귀 기울이며 조화롭고 여유롭게 행동하는 사람. 내 마음이 가난하고 헤맬 때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람.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서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목소리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 약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 더 강인해지려는 사람. 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매일매일 깊이를 더하며 성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가장 빛나는 자리를 후배들에게 양보하고 그들의 성장을 응원하며 격려해 줄 수 있는 넉넉함을 지닌 사람. 20대에 보면서 멋지다고 생각했던 선배들의 모습을 이제는 내가 행동으로 실천해 나가고 싶다.


30대의 마지막 자락에 서 있는 지금, 40대가 된 내 모습은 어떨지 더욱 기다려진다. 30대에서 벗어나 40대가 되었을 때 나는 더욱 성숙해지고 풍요로워지리라. 마음의 번뇌에서 벗어나 세상을 보는 시야는 한층 넓어지리라. 정신과 육체에 매몰되지 않고 본연의 순수한 모습에 한층 가까워지리라. 20대의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생각들이 솟아난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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