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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미리내 May 29. 2023

지젤, 실은 처녀귀신

엄마의 첫 발레공연

스트레칭을 위해 취미발레를 다닌 지 4년이 다되어 가는 지금도 난 180도 다리 찢기는커녕  두 다리 펴고 바닥에 앉을 때도 여전히 무릎이 불쑥 솟아나는 타고난 강직함의 신체를 보유 중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에 온몸으로 저항의 의지를 보이기 위해 허리를 굽히지 않고 세수를 하셨다고 했던가.


난 아침에는 허리가 굽혀지질 않아 타의 100% 의 쓸모없는 꼿꼿함을 유지하며 고양이 세수로 아침을 연다.

이런 나에게 바를 잡고 하는 바워크는 견딜 만 하지만 , 바 없이 오로지 유연함과 코어의 힘으로 중심을 버티며 하는 센터는 참 전신거울이 얄궂을 정도로 보기 힘든 몸부림이다.


그러나 시작한 지 10분 만에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고강도의 발레 운동은 수많은 기술과 동작들이 겹겹이 버티고 서있는 가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상이며, 시범을 보이는 선생님이 보여주는 우아함과 강철 같은 그 몸짓은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날 꾀이며 로렐라이 강가에 버티고 있는 사이렌급의 현혹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나의 몸부림과 의지를 매번 비웃으며 차라리 그 시간에 헬스를 해라, 봐라 엄마보다 더 뻣뻣하면서 학원은 왜 다니냐며 온갖 구박과 타박을 일삼는 엄마와 함께 국립발레단의 공연을 보기로 했다.


하늘하늘하기가 리본 같으며 낭창낭창함이 버드나무 못지않은 우리 발레쌤으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국립발레단 출신이시다.

인종의 다름은 익히 알지만 종족의 다름을 인정케 하는 특출 난 신체를 가진 선생님과 같은 분이 몸담았던 국립발레단의 공연이라니, 놓칠 수 없어 아침 ktx 첫차를 타고 서울로 달렸다.


종로에서 아귀찜을 먹고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눈 흘기듯 구경하며 서초로 향했다. 국립발레단의 공연이 예정된 예술의 전당으로.

평생 발레공연은 처음인 엄마에게 커피 한잔을 사드리며 식곤증 방지 및 선행학습을 착실히 해드렸다.


왕자가 호숫가에서 첫눈에 사랑에 빠진 여자가 있다. 둘은 결혼을 약속한다. 악독한 마법사의 마법에 걸려 밤에는  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낮에는 백조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여주인공은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면 이 마법에서 풀려난다.

곧 왕자의 생일잔치가 열리는 날 둘은 결혼을 발표하기로 한다.

그리고 마법사는 자신의 딸을 주인공의 모습으로 둔갑시켜 왕자의 생일날 청혼을 받게 만들어 주인공을 영원한 저주에 빠지게 한다는 비극적인 내용이 백조의 호수이다.


어째서 사람이 백조냐, 왕자는 눈썰미가 그리 없어서 어디다 쓰냐, 마법사는 쓸데없이 마법은 왜 걸었다니

등등 엄마의 반문을 예상했으나 순순히 끄덕이며 선행학습을 마친 엄마와 패널 앞에서 기념사진까지 야무지게 마치고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좌석이 몇 개 없어 따로 떨어져 앉아야 했다. 귀청이 울리는 영화관에서도 일단 반쯤 졸면서 시청하는 게 국룰인 우리네 부모님 아니신가. 더구나 익숙하지 않은 발레라니.

연신 불신의 눈빛을 보내며 엄마를 단속했지만 자리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저 코라도 안 골기를 바라며 1막을 감상했다.


어라, 분명 호숫가에서 백조들이 떼로 나와 춤을 추고, 왕자가 나와 주인공에게 반해야 하는데 물가는커녕 웬 시골마을에서 왕자가 방황하는 게 아닌가.

거기다 그 동네 처녀와 연애까지 하네? 그때서야 펼쳐본 브로셔에는 '지젤'이 떡하니 적혀있었다.

다급함에 엄마를 돌아보았으니 어두컴컴해서 좌석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1막이 끝나고 지젤의 줄거리를 급히 찾아서 엄마에게 달려갔다.


수선을 떨며 실은 백조가 아니라 지젤이라는 순진한 시골처녀가 사랑에 빠지지만 왕자와의 사랑을 못 이루고 죽는다. 그러나  죽어서도 요정이 되어 왕자를 지킨다... 며 급히 검색한 줄거리를 브리핑했다.

(예매의 순간부터 공연 플래카드 앞에서 사진을 찍던 순간까지 내 눈은 자체 필터링으로 백조를 지젤로 인식하는 마법을 부렸다)

남은 커피를 마시며 내 보고를 받던 엄마는 , 옆자리 수원에서 올라온 커플과의 스몰토크를 전해주며 나의 허술함을 평소처럼 개의치 않았다.


짧은 휴식 시간이 지나고 다시 시작된 2부.

희고 하늘거리며 발목까지 오는 치마를 입은 한 무리의 발레리나들이 수면 아래에서 쉴 틈 없이 물장구를 치지만  흔들림 없는 우아함을 뽐내는 백조처럼 마치 나는 듯, 다수의 발레리나 군단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미끄러지듯 무대를 지나갔다.


부레부레부레.

발레 시간에 배웠던 동작이다. 발을 종종거리며 상체는 한없는 평온함을 유지하는 동작이지만 막상 내가 하면 현타가 심하게 오는, 부들부들로 재명명해야 하는 동작의 진짜를 감상할 수 있었다.


군무의 정수요,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넘어 귀기까지 느껴지는 소름 돋는 춤이 한동안 이어졌다.

한쪽 뒤통수는 심하게 엄마의 반응이 궁금했지만 돌아볼 여력도 없이 공연에 빠져들었다.

다음번 수업부턴 진짜 더 열심히 해야겠다며 뜻하지 않게 학구열을 불태우고 공연이 끝났다.


"어땠어? 재밌었어? 흰 옷 입고 단체로 춤추던 거 너무 멋있지?"


엄마의 감상평이 너무 궁금했다.

"처녀귀신 얘기더만"


".......?"


"소복 맞춰 입고"


"처.. 천잰데?"


발레는 수영복 입고 허부적 거리는 운동이라던 엄마는 지갑에 표를 얌전히 꽂아 두었고 , 그 후로도 자주 물어본다.


"그 처녀귀신 나오던 거 , 그거 이름이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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