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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미리내 Nov 05. 2020

잃어버린 주량에 대하여

안주는 눈 맞춤이지

생애 첫 음주의 기억은 네다섯쯤 , 혼자 냉장고 문을 열고 문을 꺼내 마실 나이로 기억한다.

한여름, 노랗고 커다란 양은 주전자에 보리차를 기대하고 주둥이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삼켰다. 반도 안되게 찰박  잠겨있던 주전자를 힘겹게 입에 대고 기울였는데 텁텁하고 뭉근한 질감의 음료수가  쏟아져 들어왔다. 속도와 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서너 모금 마실 때, 그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시골에서 살던 시절이라 엄마가 막걸리를 직접 담가 항상 채워 놓았고, 술을 내리고 남은  술지게미에 설탕을 섞어 종종  간식으로 먹어서 텁텁한 막걸리의 맛은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다.


그리고 기억할 두 번째 내 음주의 기억은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그때나 지금이나 떠날 곳은 제주도였다.

큰 방에 반애들이 모두 모여 담임쌤이 사 오신 맥주와 소주, 과자로 정제된 일탈을 즐기던 시간.

시작은 잘 노는 아이들이 술을 따르고 권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조별 과제를 하듯 나눠 앉아 술을 먹던  내 앞에도 종이컵이 놓이고 얼굴이 벌게진 같은 반 아이가 소주를 반쯤 채워 권했다.

마치 동생에게 연장자의 권위와 존경을 바라는 듯 반쯤은 어른스레 , 반쯤은 술을 마시고 찡그리며 컥컥거릴   반모범생의 모습을 기대하며.


    그 술잔을 집어 드는 순간, 알았다.


         " 이 반에서 내가 제일 많이 마시고,

             제일 오래 멀쩡할 것임을."


입안에 살짝 침이 고였고, 마시기도 전에 지금 이 공간을 티브이 보듯 멀찍이 떨어져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입안으로 그대로 털어 넣은 소주는 예상대로 달았다. 음료수나 사탕의 달콤함이 아니라 설탕물에 미원을 탄 듯 밍밍하며 달달했다. 안주라고 벌려놓은 과자는 집지 않았다. 쓴맛을 가려줄 안주는 필요 없었다.

신기한 듯 모여드는 애들이 내민, 아니 한 술 한다던 노는 애들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채 넘기지 못하고 호기롭게 까놓기만 하던 소주병에서 따라주는 술을 마치 도장 깨듯 이 애 저 애에게서 받아마셨다.

평소 한마디도 섞을 일이 없던 아이들과 눈을 마주 보며.


외가, 친가 할 것 없이 한 술 한다는 집안의 자손이라 예상은 했었다. 내 DNA는 술에 탁월할 것임을.

그 밤, 그 방에서 받아마신 술만 소주 세병은 너끈할 듯하다.  감당할 정도만 마실 것을 조건으로 반에 술을 넣어주셨던 담임쌤 눈에 한둘씩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애들이 눈에 띄었고, 그렇게 자리는 순간 정리되었다.

이불 위에 누워 눈 위로 팔을 들어봤다. 의도보다 훅 올라갔다. 거리감을 반쯤 잃었다. 돌아 누우면 세상이 빙글 도는 듯 도했다.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  예정된 관광일정을 마치는 버스 안은 조용했고 생기도 없었다. 다들 숙취로 힘들어하거나 가라앉은 분위기에 꾸벅꾸벅  뿐이었다.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오늘 돌아간다고. 가면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콩나물국을 먹어야겠다고.


이상이 내 인생에 술이 들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 후로 어찌 된 일인지 소주 반잔에 두통과 어지러움을 동시에 얻고, 술의 쓴맛에 질색하며, 금세 얼굴이 벌게지고 심장이 마구 널뛰는 알코올 분해효소가 없는 듯, 일명 알쓰의 전형이 되었다.

논알코올을 찾게 되고 달달한 발포 와인은 4% 이하 , 반잔으로 주량이 정해졌다.


평생 쓸 술운을 그 밤에 모두 써버렸거나 , 체질이 변했거나 어떤 이유이던, 난 그 후 술과 친하지 못한 사람이 됐다. 아쉽다거나 재미를 잃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겨우 하룻밤이었으니까.                  

그저 그날의 풍경을  고등학교 시절을 통틀어 그곳에 있었던 모든 이들이 꾸밈없이 서로를 드러낸 유일한  순간으로 기억할 뿐이다.

누군가는 술을 마셔서, 누군가는 으레 마셔야  그런 분위기에 도리질을 쳐서,   누군가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화장실 바닥을 기는 경험을 하며.   


 이상 술이 사회생활이나 친목의 바탕이 되지 않는 시대이다.(라고 믿고 싶다) 모든 이와 더불어  지내지 않아도 되고, 나와 맞지 않는 장소,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아는 어른이 됐다. 술은 그저 가끔 기분을   잔에 반쯤   채워 분위기를 내면 그뿐이다.


그리운   밤의 표정들이다. 발간 얼굴로 나와 눈을 맞추고 숙취로 해쓱해진 다음날 서로를 씨익 

웃으며 지나쳤던  표정의 아이들.


어디서든 술을 마시는 순간들이 그 밤의 그 분위기만큼만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프거나 슬프거나 속이 상해서가 아니라 그저 발갛게 얼굴을 빛내고 눈을 마주치는 자리가 필요한 그런 어른들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어린 내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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