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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의 공돌이 Sep 05. 2018

호의도 평가 받는다

폐업은 내 인생에서 역사적 사건이었다. 생애 첫 자영업이었고, 생애 첫 폐업이었다. 중대한 결정인 만큼 오래 고민했었다. 결국 하고나니 홀가분했다. 그런데 폐업 후 점점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분간 벌이 없이 지낼 생각이었고,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몰랐다. 당장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뭐해서 먹고 살지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걱정을 하지 않겠다, 의 각오로 백수생활에 임했지만, 정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걱정 안 하기’였다. 그때 나에겐 ‘걱정 안 하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폐업 후 거의 매일 새벽 3시 정도에 잠들어서 다음날 낮 12시에 일어났다. 폐업과 동시에 나태함이 내 몸을 휘감았고, 하루하루 거침없이 식탐과 수면욕을 발산하는 데에 온몸을 불태웠다. 늦게 일어나니 하루는 아주 짧았고, 늦게 잠드니 밤은 무척이나 길었다. 길고 긴 밤에 하는 일이라고는 앞날을 걱정하며 무언가를 마구마구 먹는 것이었다. 나는 나태함이 선사한 자유의 시간을 앞날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데에 썼으니, 걱정과 불안이 분비시키는 위산에 모든 장기가 녹아버릴까 걱정되어 허한 속에 무언가를 계속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리고 보니, 먹고 자고 걱정하느라 50여일이나 보내버렸음을 깨달았다. 도대체 뭐가 걱정이기에 나는 매일 이성을 잃고 먹어대는 식충이가 되어버렸는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막막함 때문일까.  어쩌면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는 것이 한낱 핑계에 불과한 건 아니었을까? 그저 편하고 쉽게 돈 벌고 싶어서 ‘좋아하는 일’을 찾는다는 지극히 고루한 핑계를 대고 있는 건 아닐까?


정신을 차렸다. 뭐라도 해보자, 라고 생각하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그랬더니 거짓말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일찍 일어났더니 일찍부터 먹어대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침형 식충이가 되어버렸다. 젠장.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건설적으로 먹어보자고 결심했다. 베이컨과 양상추와 토마토로 웬만한 브런치 카페에서 파는 것보다 더 훌륭한 BLT 샌드위치를 아침마다 만들어냈다. 오래전 출근길 트럭에서 팔던 것과 똑같은 토스터도 만들어냈다. 그 토스터를 먹으면서 나는 지금은 가산디지털역으로 바뀐 가리봉역을, 아내는 양재역의 아침 공기를 떠올렸다. 볶은 양파에 계란을 풀고 휘휘 저어서 만든 스크램블에 토마토까지 곁들여 바삭한 마늘빵과 함께 먹으면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잠시나마 걱정과 불안을 잊는 시간이랄까.


우리가 카페를 열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먹던대로 브런치 메뉴를 내놓으면 되지 않을까, 식재료에 따라 매일 다른 브런치 메뉴 20인분 정도는 우리 둘이 거뜬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말이다. 아침마다 우리가 느끼는 이 기분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작은 보람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돈도…… 돈도 되려나?


민박집을 운영하며 아침마다 9인분의 조식을 차려낸 적이 있다. 그 당시 제주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로 여는 민박집마다 정성을 다해 조식을 내놨는데, 우리도 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우리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정성을 다해, 신선한 원두로 커피를 내리고, 제주 감귤 주스를 준비하고, 제철 과일을 준비하고, 최대한 양 많게, 사진 잘 나오게 예쁘게 세팅해서, 그렇게 조식을 내놨다. 그것도 무료로.


9인분 정도야 거뜬했다. 숙박객에게 무료로 제공하였으니 팔릴지 안 팔릴지 걱정하며 재료 준비를 하는 고민도 없었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기계적으로 하면 되었다. 그리고 손님 대부분 맛있게 잘 먹었다며 만족스러워 하는 모습이 작은 보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침마다 테이블을 예쁘게 세팅하고, 신선한 원두를 갈아서 직접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고, 약불에 천천히 저어가며 9인분의 수프를 끓이고, 양파와 계란을 볶고, 빵을 구웠다. 그 경력을 살려서 브런치 카페를 열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간과해서는 안 될 게 있다. 우리가 민박집에서 내놓은 조식은 무료였다는 것이다. 만족도가 높았던 건 그것이 무료였기 때문이다. 무료였으니 손님들이 우리의 정성을 알아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민박집을 차린 초창기에 저녁 식사를 판 적이 있다. 대단한 건 아니고 대형마트에서 파는 냉동 볶음밥인데 프라이팬에 볶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제주는 저녁 7시만 되어도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았고, 편의점도 하나 없던 시절이었다. 가끔 밥 때를 놓쳐서 입실을 하는 손님이 있었다. 보통 제주를 오랜만에 왔거나 처음 온 손님인 경우가 많은데 제주까지 여행을 와서 저녁밥을 굶게 될 줄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 한 손님을 위해서 냉동 볶음밥을 5천원에 팔았다. 귀찮았지만 우리 집에 묵는 손님에 대한 호의였다. 냉동볶음밥 하나에 2,400원. 조리에 드는 우리의 수고스러움과 귀찮음, 직접 담근 무 피클, 그리고 이 냉동 볶음밥이 아니면 저녁을 굶을 수밖에 없는 그 손님의 난처함까지 합치면 5천원이라는 가격은 공짜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단 돈 10원이라도 가격이 책정되는 순간 그것은 혹독한 평가의 대상이 된다. 가격이 얼마냐는 상관없이 고급 레스토랑에 버금가는 수준의 맛이어야만 만족도가 높다는 것이다. 그 5천원짜리 냉동 볶음밥을 준비하는 우리의 수고스러움을 이해하고 고마워한 손님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냉정한 맛 평가와 가성비를 따지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볶음밥은 좀 비싼 듯.” 같은 글 말이다. 장사를 하면 호의도 평가 받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 그걸 2,400원에 팔았어야 했는데, 5천원이나 받아서 기분이 안 좋으셨구나.


손님을 향한 마음의 문이 서서히 닫히기 시작한 건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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