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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의 공돌이 Aug 21. 2019

30년 뒤쯤에 보자

제주로 오기 전, 나의 직업은 휴대전화 개발 연구원이었다. 작은 휴대전화 안에도 분야가 참 많은데, 크게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나뉜다. 거기서 또  들어가면 더 세세한 분야로 나눠지는데, 간단하게 말해 나는 하드웨어 무선통신 회로개발 연구원이었다. 무선 파트라 회로뿐 아니라 안테나도 다루었는데, 그 조그맣고 납짝한 박스에 온갖 종류의 안테나를 구겨 넣느라 지새운 밤이 얼마나 많은지 세지도 못하겠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세상 참 빨리 변한다는 걸 온몸으로 체감한 직업이었다. 내가 주임연구원쯤 되었을 복잡한 회로가 손톱보다도 작은 IC에 집적되었다. 성능 신뢰성이 보장된 IC 하나로 우리들의 할 일은 크게 줄었고, 그건 분명 커다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작은 휴대전화의 액정 화질은 눈부시게 좋아졌고, 트위터나 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차고 넘치도록 데이터 처리 속도가 빨라졌다.


내가 퇴사를 할 즈음에 겨우 문자 메시지나 주고받던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뭐, 각종 센서에, 블루투스에, 와이파이에.... 그 작은 휴대폰 안에 없는 게 없다.


같은 팀에 바쁜 시간을 쪼개서 대학원에 다니던 선배가 있었는데, 석사를 마치더니 곧 박사도 하고 싶다고 했다. 일과 학업 둘 다에 열정적인 모습이 보기 좋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바닥도 한창이었던 몇 년 전에나 좋았지, 뭘 저렇게까지 공부할 일인가, 차라리 공인중개사를 따는 게 낫지 않을까,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그 후 아무것도 안 되었고, 그 선배는 분야를 바꿔서 계속 연구원으로 살고 있다. 지금쯤 한 50살 정도 되셨으려나? 50살에 치킨집을 차리지 않고 연구원으로 계속 산다는 건 뭐랄까, 매사가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나랑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경지의 위인이랄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작은 가게를 오래 꾸려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 이 땅에는 주인의 손때 묻고 온기 스며든 작은 가게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연구원 생활 역시 오래 못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선배는 끊임없이 공부했고 새로운 분야에서 연구원으로 살고 있다.


매사에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가 모든 계획과 시도를 가로 막는다. 한때 나는 그걸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이라고 착각했다. 필요 이상의 긍정적인 태도가 현실을 왜곡하고 삶을 왜곡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내가 정말로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의 사람이었다면, 석사 하고 박사 할 노력으로 공인중개사나 따지, 라던 나는 지금쯤 부동산 부호가 되었겠지.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고 (=못했고), 외부에서 오는 문제들을 마음을 다잡고 해결해가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작은 가게를 꾸려가고 있다.


연구원 시절을 되돌아보면, 나는 실험실보다는 PC앞에서 데이터 정리하고 보고서 쓰는 걸 훨씬 좋아했다. 그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연구원이 실험을 싫어했다는 것 말이다. 때로는 마치 소설을 쓰듯이, 보고서 하나는 기똥차게 잘 썼다. 회의 때 써야 할 보고서가 발생하면, 머릿속은 이미 각 폴더에 흩어진 데이터들을 취합하고 결론까지 구상했으니, 그때 발휘한 편집과 집필 능력이 나의 진정한 적성과 특기였음을 퇴사를 하고 나서야 알았다.


윗분들 혼을 쏙 빼놓겠다는 투지로 써내려간 보고서로 오랜 시간 다져진 글쓰기의 힘으로 나는 지금 에세이도 쓰고, 소설도 쓰고, 이렇게 브런치에도 글을 쓰고 있다.


내 안에는 뭐라도 써야만 하는 DNA가 있었고, 현재 제주에 살며 그걸 발전시켜 나가는 걸 일상의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뭐가 되지는 못 했지만, 어쩌면 나는 지금 뭔가가 되어가고 있는 중은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다. 30년 뒤쯤에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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