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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방의 공돌이 Jul 24. 2021

아주 강력한 무기

현재 직장에서 나는 하드웨어 개발팀 팀장이다. 제주로 오기 전 일했던 경력을 이어붙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지금의 이 일, 이 회사에 만족한다. 스트레스가 없진 않다. 사람이 숨 쉬고 사는 게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사람이 먹고 놀아도 스트레스가 생기는데 직장생활이 스트레스가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충분히 받아들이고 소화해 낼 수 있는 양이다.


일에 대한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과거에는 이러지 않았다. 주임연구원, 아니 선임연구원 시절까지만 해도 일을 참 좋아했었다. 그때는 하는 일이 마치 맑은 날에 벽에 하얀색 페인트칠을 하는 것 같았다. 내 의지대로 일이 진행되었고, 성과도 좋았고, 잔머리가 빛을 발한 임기응변까지 능력으로 인정받았다. 책임연구원이 되니 일은 마치 시멘트를 바르는 것과 같았다. 열심히 시멘트 발랐는데 금방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뜻대로 잘 안 되고, 성과가 좋지 않은 적도 많고, 자주 불안했다. 일에 대한 만족도는 연차가 높아질수록 바닥을 향해 주저앉았고, 호시탐탐 직장탈출, 급기야 도시탈출을 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왔다.


앞서 공장에서의 짧은 근무를 빼면 10년 만에 다시 일을 하게 된 셈이다. 10년 만에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하니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법도 바뀌고 문화도 바뀌었다. 과거처럼 야근과 휴일 근무를 강요하지 않는다. 법이 그렇단다. 이 정도면 세상이 달라진 거다. 격무에 지쳐 깊이 잠들었다가 깼는데, “야! 이제부터 야근 금지래.” 란다. 도대체 1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가? 오랫동안 회사 밖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변화가 서서히 다가왔을 테지만, 나에겐 마치 천지개벽과도 같다.


일단 육체적 피로가 없으니 업무 스트레스가 생겨도 차분히 대응할 여유가 생긴다. 화가 훅 올라오다가도 한 템포 쉬며 이걸 어떻게 대처할지 천천히 생각하게 된다. 흔히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육체도 정신을 지배할 줄 안다. 사실 이게 훨씬 건강한 삶이다. 지친 육체를 정신력으로 제어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란 말인가. 몸이 힘들면 모든 걸 멈추는 게 정상이다.


월급만 생각하면 웬만한 문제는 하찮아 보인다. 월급은 그런 힘이 있다. 자랑할 만한 연봉은 아니지만, 10년 전과 지금의 근무 시간을 비교 계산하여 시급을 따져보면 납득이 된다. 오래 전엔 주말에 쉬고, 제때 퇴근만 할 수 있다면 월급이 좀 적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지금 그렇게 되었다. 월급을 조금 잃는 대신 워라밸을 얻은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10년 전 제주도로 온 진정한 이유인 것이다.


대체로 만족스러운 직장인데 최근에 까다로운 숙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팀원을 채용하는 것이다. 제주에서 사람 뽑기 정말 어렵다. 한국에서 수도권을 벗어나면 사정은 비슷하겠지만 제주는 섬이라서 더 어렵다. 팀원 채용공고를 내고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검토한 지도 몇 달. 내심 포기한 상태다. 포지션에 딱 맞지 않는 지원자라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모든 지원서에 핵심이 빠져 있어서 도무지 면접까지 이어지질 못한다. 바로 '나를 뽑아야 하는 이유'. 바로 그게 빠져 있다.

현대인에게 글쓰기는 아주 강력한 무기라고 강조하고 싶다. 거의 모든 사람이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기 때문에 글쓰기의 중요도가 저평가되어 있다. 나를 뽑아야 하는 이유가 빠져있는 지원서들을 읽으며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구직자였다. 직장을 떠난 지 10년 만에 구직활동을 하며 느낀 건 제주에는 정말 갈만한 회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웬만한 직종의 급여는 최저임금을 크게 넘지 않고, 나 같은 개발 경력자를 필요로 하는 회사도 없었다. 육지에서는 제아무리 대우 받는 경력자라 할지라도 제주엔 일 할 곳이 없다. 그래서 이 회사에 응시할 때 많지 않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원서에 나를 뽑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


이제는 직원을 뽑는 입장이 되니 그 반대의 고충이 있다.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개발자 모집에 지원하려면 그동안 본인이 어떤 공부를 했고, 어떤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관심분야와 전문분야가 무엇인지를 상세히 기술해야 한다. 그런데 기대하는 내용이 없는 이력서가 대부분이니 채용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다.


구직자 입장에서는 갈 만한 회사가 없고, 회사 입장에선 뽑을 사람이 없는 것이 제주도 채용시장의 현실이다. 부족한 인력을 채우는 일이 팀장인 나에게 맡겨진 첫 미션인 것만 같다. 정말 가혹한 미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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